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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나무에게 미안한 시대

중앙일보 2016.01.30 00:01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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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한 해 전 세계적으로 인쇄용지를 만들기 위해 베어지는 나무가 대략 40억 그루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바라본 책꽂이는 나무에 대한 미안함을 자극했다. 출판된 논문들이 담긴 학술지 더미를 보며 대략 계산해 본다. 30년생 원목 한 그루로 만들 수 있는 종이가 약 60㎏이라 하니, 권당 700g으로 어림잡았을 때 약 85권 정도가 나무 한 그루로부터 만들어졌을 터. 책 위로 나무 몇 그루가 겹쳐 보인다. 내 앞에 쌓여 있는 이 논문들이 과연 원래의 나무만 한 소중함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자연 그대로 서 있는 나무의 자태만큼 근사할까. 의식적으로 마음 한편 학술적 가치를 우기고 싶기도 했으나, 양심은 미안한 마음을 가릴 수 없었다.

 “출판하지 않으면 끝장(publish or perish)”이라며 논문 생산을 장려하는 미국 대학가의 영향이 우리 사회 특유의 성실성 혹은 과열성과 결합돼 논문 출판에도 한국형 성과주의가 있었다면 너무 비판적인 말일까. 그렇게 수없이 배출되는 학문적 업적에 대한 평가가 논문 “편 수”로 이뤄지는, 웃기고도 슬프다는 뜻의 요즘 표현처럼 ‘웃픈’ 현실이 실제로 존재한다. 인간의 지식을 물건 고르듯 숫자로 세는 것의 불합리성에도 불구하고, 평가 기준이 필요함 역시 엄연한 현실. 본래 나무의 형태보다 나은 지식과 그렇지 못한 지식이 함께 편 수로 세어지는 행정적 과정을 거친다.

 독자들께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으나, 이런 수량적 평가의 한계를 질적으로 보완하고자 인용지수(Impact Factor)가 사용되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학술지에 실린 총 논문 편 수에 대비해 다른 논문들에 얼마나 인용됐는가 횟수를 계산해 그 학술지의 영향력을 구하는 방식이다.

 이 기준을 사용한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한국연구재단 등재(혹은 후보) 학술지 약 2200종 중에서(전체는 무려 5000종 이상) 최근 통계상 인용지수가 0인, 즉 한 번도 인용되지 않은 학술지가 약 150종 존재한다. 각 학문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겠으나, 간단히 말해 약 7%의 학술지는 다른 논문에 의해 단 한 번도 인용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 방식도 여전히 양적 계산 방식으로 제한점이 많다. 그러다 보니 2013년 일단의 연구자들이 ‘연구 평가에 대한 샌프란시스코 선언(San Francisco Declaration on Research Assessment)’을 통해 인용지수의 폐해를 지적하며 평가가 과학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 바도 있다.

 어디 종이로 인쇄된 논문뿐이겠는가. 나무뿐만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다른 형태의 ‘나무’들에게도 미안함을 느낀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수요를 넘어 가르침은 과잉 공급되고 있으며, 옥석이 가려지지 않은 정보가 가득하고, 멘토링을 자처하는 주장이 난무한다. 침묵보다 못한 언어가 쏟아져나오고, 조용히 들어주는 공감과 경청보다 못한 조언이 넘쳐나는 시대.

 인간의 지식을 통해 세상에 기여해야 하는 생산의 과정이 오히려 소비의 과정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 생각하게 된다. 현재까지 축적된 지식들이 양적 성장을 이뤄 왔다면, 이제는 다음 단계의 질적 발전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글의 의도를 벗어나 종이를 아끼기 위해 전자출판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누군가 한다 해도 ‘나무’에 대한 미안함을 가리기엔 충분치 않다. 본래 나무의 소중함보다 부족하더라도 인간이 더 나은 지식을 위해 계속 노력해 나가라는 격려는, 나무가 우리에게 해주어야 할 위로이지 인간이 먼저 할 변명은 아닐 것이다.

 ‘나무’에 덜 미안한 글로 독자들을 앞으로 만나 뵙고 싶다는 반성과 각오로, 칼럼의 첫 인사를 올린다.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약력 : 미국 시카고대 박사. 뉴욕 아델파이대 조교수 역임.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장, 미래융합연구원 부원장. 정신보건 및 보건사회복지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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