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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워치] 한·일 관계와 역사의 남용

중앙일보 2016.01.30 00:01 종합 2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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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UCSD) 석좌교수

급속도로 악화된 한·일 관계만큼 미국의 아시아 전문가들을 낙심시키는 것은 없다. 2011년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60%는 상대방 국가에 대해 대체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 2014년 수치는 일본에서 32%, 한국에서는 15%로 떨어졌다.

 대부분의 분석에 따르면 역사 문제가 관계 악화의 주범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위안부 희생자 문제뿐만 아니라 독도까지도 역사 부정의 사례다. (독도는 명백히 한국 땅이다.)

 국제 관계에서 역사 문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똑 부러지는 답을 내놓을 수 없다. 현실정치(Realpolitik)는 뒤엉킨 실타래를 푸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복합적인 심리적 요인, 감정이 개입하기 때문에 역사 문제는 전략이나 경제적 이익과 달리 화해를 이루기 힘들다. 일본인들의 사과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일까.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70여 년 전에 범한 잔혹행위에 대해 영원히 원한을 품을 것일까.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간 합의가 지난해 12월에 나오자 미국은 큰 기대를 품게 됐다. 수십 년 동안 삐걱거리던 한·일 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의문을 살펴보면 무엇이 일본에 핵심 이슈인지 드러난다. 적어도 한·일 양국 간의 정치 문제로는 위안부 문제를 묻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조(小淵?三) 전 총리를 만났을 때 그러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용기가 필요한 시도였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다시 등장한 역사 교과서 문제를 다뤄야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역사 문제가 종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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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 핵심에는 과거사를 동시에 기억하고 초월하고 그리고 어쩌면 잠시 ‘격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이 있다.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역사 속에 함몰돼도 안 된다.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필요한 첫걸음은 일본이 입힌 피해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어떤 합의를 하고 금전적 배상을 하더라도 일본의 침략이 미국, 아시아, 그리고 일본 스스로에게 가한 파괴 행위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다. 피해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과거 사건들의 규모와 심각성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회복 불가능이라는 관념은 그 어떤 합의나 사과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성찰을 요구한다.

 한국인들에게는 ‘감정이입’이 도전이다. 일본 역사는 군국주의적인 권위주의 때문에 탈선했다. 그 결과 일본인들 자신과 외국인들이 희생됐다. 일본인들에게는 이러한 과거에 대해 성찰하고 자신이 입은 상실을 추념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일본이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민족주의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매번 여론조사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애국주의나 민족주의 성향이 약하다.

 전시로부터 두 세대가 지난 지금 과거의 악행을 탓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 일본 대중이 전쟁 범죄를 용납한다고 진짜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인들이 ‘그렇다’고 믿고 오늘의 일본을 바라본다면,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과거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오늘에 대한 이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일본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 근본적으로 탈바꿈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일본이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더 어려울 수 있다. 일본이 민주국가이므로, 시끄럽게 목소리를 내지만 소수에 불과한 주변부 세력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부정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미국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노예제, 남북전쟁, 아메리카 인디언, 심지어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있다. 일본 정부가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 엘리트를 포함한 일본의 엘리트는 이런 소수파로부터 스스로를 단호히 격리하고 소수파에게 창피를 줘야 한다.

 이 점에서 역대 일본 정부들은 ‘규율’ 없이 행동했다. 또 역사를 진지한 성찰이 아니라 끝나지 않을 협상의 문제로 봤다. 최근에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은 한·일 간의 합의가 이룩한 성과에 역행해 피해 여성들이 성노예였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외부의 제3자가 보기에는 피해 할머니들이 성노예였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팩트(fact)다. 학생들이 위안부 소녀상 주변에서 야영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본 외상은 침묵했어야 한다. 그게 일본에 좋은 일이었다. 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

 감정이입과 규율은 사소한 덕목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감정이입과 규율을 위해서는 큰 도약이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그들 대다수가 공유하는 진실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간단한 질문 한 가지를 해야 한다. 역사를 동원하는 게 한·일 양국 국민을 가깝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까. 정치가 해결할 가능성이 전무한 쓰라린 분란을 심는 데 역사가 남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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