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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동북아 vs 동남아, 무엇이 성패를 갈랐나

중앙일보 2016.01.23 00:21 종합 2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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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힘
조 스터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프롬북스
503쪽, 2만3000원


살아 있는 역사와 경제가 잘 버무려져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텔링이 됐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이 책을 ‘2014년 최고의 책’으로 꼽은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에게 20세기 초반까지 서구에 뒤처져 있던 아시아의 급격한 번영은 늘 수수께끼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그는 궁금증을 확 풀었다고 한다. 아시아 내부에서도 나라별로 엇갈리는 경제발전의 성공과 실패의 공식이 명쾌하게 제시돼 있기 때문이다. 책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예리한 통찰과 생생한 현장감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이야기의 주무대는 동아시아 주요국이다. 공간은 같아도 이분법의 분류가 가능하다. 한국·일본·대만·중국을 포함한 동북아는 성공의 길을 걸었고, 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 국가는 실패 모델로 분류됐다. 저자는 똑 같이 빈손으로 출발한 동아시아를 성공과 실패로 갈라놓은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헤쳤다.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고 일본에서 인도네시아에 걸친 생생한 현장 탐사로 스토리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아시아 경제발전에 대한 탐구는 이미 1990년대부터 개발경제학이란 테마가 따로 형성될만큼 경제학자들의 뜨거운 관심거리였다. 일본의 기적에 이어 한국의 기적이 일어나고 잠자던 중국이 깨어나자 그 성공 요인을 밝히려는 시도였다. 한국의 개발연대 전문가 앨리스 앰스덴에서 조셉 스티글리츠·폴 크루그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백가쟁명을 벌인 이유다. 한데 일관된 법칙을 내놓지 못했다. 개발경제의 첨병인 세계은행조차 본질을 꿰뚫지 못한 채 아시아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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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경제성장 비결은 경제학자들의 오랜 관심거리다. 『아시아의 힘』은 국가 주도의 3가지 정책에서 그 답을 찾는다. [사진 프롬북스]


당시 아시아 연구자들은 한국을 홍콩·싱가포르·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묶기도 했다. 한국은 일정 규모의 인구를 갖고 온전한 정치·경제 체제를 갖춘 하나의 국가다. 이에 비해 홍콩·싱가포르는 도시국가에 불과하다. 잘못된 틀로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 그간의 연구가 피상적인 차원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책의 저자 조 스테드웰은 어려운 퍼즐을 맞추듯 동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리를 명쾌한 논리로 풀어냈다. 그는 동북아 국가의 성공 요인을 세 개로 꼽았다. 토지 재분배를 통한 가족농(家族農)의 활성화, 이를 통해 발생한 잉여 수입을 저축으로 유도해 그 자금을 활용한 수출 제조업 육성, 은행을 정부 통제 아래 둔 통제 금융이다.

스테드웰의 통찰은 흥미롭다. 먼저 가족농이다. 가족농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열강이 물러가자 동북아 국가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아래 농지개혁을 통해 유상·무상의 토지 재분배를 실시했다. 중국은 마오쩌둥 집권으로 한때 집산화가 됐지만 1978년 덩샤오핑이 등장하면서 다시 자율 경작이 가능했다. 가족농이 활성화하면서 이들 지역에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가계 단위의 잉여 자금이 쌓이면서 저축이 형성됐다. 이는 산업자금의 모태가 됐다. 이에 비해 동남아에선 농지개혁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소수의 지주가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게 산업화의 기반을 제공하지 못한 배경이다.

가족농은 이제 동북아시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중·일의 경제 발전 단계가 지난 70~80년대를 거치면서 모두 제조업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들 동북아 국가는 제조업을 육성할 때도 정부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석유 같은 부존자원이 없으니 수출 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출을 하지 않는 기업엔 금융 지원이 끊기고 회사 문을 닫는 위기에 이르는 일도 흔했다.

동남아 국가는 제조업에서도 다른 길을 갔다. 농지개혁을 하지 못해 가족농을 통한 잉여 자본이 없던 터에 제조업도 소홀했다는 얘기다. 동북아 국가에선 금융의 역할도 컸다. 초기엔 농촌에 막대한 보조금이 투입됐고, 제조업을 키울 때도 금융은 채찍과 당근이었다.

저자는 그간 아시아를 들볶았던 워싱턴 합의(미국이 정한 국제질서)나 신자유주의는 서구의 잣대일 뿐이라고 갈파한다. 그러면서 동북아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금융시장 개방, 작은 정부와 규제완화 같은 워싱턴 합의를 무조건 따르다간 외환위기 같은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좋은 경제정책도 나라마다 실정에 맞춰 쓰라는 주문인데 지금까지 서구가 아시아의 약점이라고 비판했던 정부의 통제와 개입도 나름의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저자는 시민의식과 사회적 신뢰가 성숙할 때 비로소 진정한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동북아의 경제적 성공을 인정하면서 부족한 점도 많다고 꼬집은 셈이다.

[S Box] 박정희 48번, 덩샤오핑 8번 등장

책에는 동아시아 지도자들이 망라됐다. 중국의 마오쩌둥·덩샤오핑 주석,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등이다. 이중 누가 가장 많이 언급됐을까. 책 색인을 세어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48 차례, 덩샤오핑 8차례, 이승만 9차례, 마오쩌둥 7차례였다. 정주영과 이병철 회장은 각각 20차례와 2차례에 걸쳐 등장했다.

 아시아 경제 전문가로 활동해 온 서양인 저자가 본 현대 동아시아 경제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많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스터드웰은 이승만 정권의 혼란, 박정희의 권위주의를 꼬집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설계한 개발경제를 동아시아 번영의 가장 극적인 모델로 꼽았다. 이들을 빼고선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얘기할 수 없다는 얘기다.

 기업인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한 정주영 회장은 새벽 3시 기상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시대적 창업가로 묘사됐다. 한데 개발시대의 이 같은 업적은 권위주의 시절에나 통했던 과거의 유산이다. 지금은 통할 수 없는 성장전략이다.

 문제는 한국의 미래다. 신흥국과 선진국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처지에 직면한 한국은 정치적 혼돈과 경제적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던지는 울림이 크다. 과거의 성취를 잊고 다시 신발끈을 조이라는 경고음 말이다.

김동호 논설위원 d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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