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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겁 없는 그 놈 목소리 “어르신 신분증 도용됐어요…돈 찾아 냉장고 넣어두세요”

중앙일보 2016.01.21 00:01 경제 2면 지면보기
서울 신림동에 사는 한모(71)씨는 얼마 전 주민센터 직원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부 정책으로 어르신 기초연금이 매달 20만원 오르게 됐다. 접수비와 보증금 300만원을 먼저 보내면 신청 후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한씨는 기쁜 마음에 바로 은행에 송금하러 갔다. 그런데 평소 안면이 있는 은행 직원이 송금 사유를 묻더니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이 의심된다”며 주민센터에 확인해보라고 권유했다.

“절대 그런 전화를 한 적이 없다”는 주민센터의 답을 듣고 나서야 한씨는 보이스피싱이었다는 걸 알고 금융감독원에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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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스피싱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금융당국과 경찰의 예방책과 대대적인 단속으로 기존 방식이 잘 통하지 않자 생각지도 못했던 신종 수법을 들고 나와 금융소비자를 현혹한다.
 
금감원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그놈 목소리(사기범과 피해자의 통화내역)’를 보이스피싱 지킴이 사이트(phishing-keeper.fss.or.kr)에 공개하면서다.

김용실 금감원 금융사기대응팀장은 “사기범들이 그간 ‘고정 레퍼토리’였던 검찰 수사관, 금감원 직원 사칭에 넘어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판단되자 주민센터 공무원, 한국전력 직원 등으로 사칭 대상 영역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전의 전기요금 수납원을 가장한 피싱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은행 직원의 전기요금 횡령 사건으로 연체자가 됐으니 우선 전기요금 1년치를 보내서 신용불량자를 면해야 보상을 받는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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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불량자라는 말에 놀라 불안감 때문에 한전에 알아볼 새도 없이 대포통장에 돈을 보냈다가 고스란히 돈을 떼인 피해자가 적잖다.

 대포통장 송금 단속이 강화되자 피해자 자택에 침입해 돈을 훔치거나 직접 만나 돈을 받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연인출제(100만원 이상 30분) 시행이나 창구 의심거래 모니터링 강화 같은 조치로 대포통장으로 돈을 받는 것은 물론 받은 돈을 찾는 것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실제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피해자 자택침입 절도건수는 지난해 상반기 32건에서 하반기 94건으로 3배로 늘었다. 피해자 대면 갈취도 하반기 147건으로 상반기(23건)보다 6배로 증가했다.

 대표적인 수법이 ‘냉장고 현금 보관’이다. “신분증이 도용돼 전 재산이 날아갈 수 있으니 냉장고에 예금 전액을 찾아서 넣어두라”는 수법이다. 5000만~1억원을 찾았다가 사기범에게 뺏긴 뒤 금감원에 신고해 호소하는 피해자가 늘고 있다.

금감원이 “냉장고는 금고가 아닙니다”는 예방 문구 홍보를 검토할 정도다. “왜 하필 냉장고냐”고 피해자가 의심하면 사기범들은 “냉장고에 넣어두면 돈 냄새가 안 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없다”는 논리를 댄다.

그런 다음 “금감원 직원이 방문해 안전조치를 할 테니 현관문을 열어놓고, 당신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주민센터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으라”고 한다.

피해자가 사기에 넘어와 시킨 대로 주민센터에 간 사이 사기범은 집에 들어가 냉장고 돈을 훔친다. 최근에는 세탁기·지하철 물품보관함에 돈을 넣어두라는 수법도 유행하고 있다.

 일부 보이스피싱 조직은 아예 업종을 바꿔 몸캠(알몸 화상채팅)이나 조건만남을 빙자해 돈을 받고 있다. 피해자를 속이거나 협박한 뒤 대포통장으로 돈을 받아 가로채는 방식이 기존의 보이스피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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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캠의 경우 여성 조직원이 스마트폰 채팅으로 남성에 접근한 뒤 “몸이 선명하게 안 보이는데 해상도를 높이자”며 ‘voice.apk’라는 파일 설치를 요구하는 게 전형적인 수법이다. 알고 보면 이는 피해남성의 스마트폰 정보를 모두 빼내 가는 해킹 프로그램 파일이다.

“부인과 자녀, 직장동료에게 알몸 채팅 동영상 파일을 전송하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돈을 보낸 뒤 뒤늦게 금감원에 신고하는 남성이 많다.

가짜 조건만남에 속아 돈을 떼인 남성도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러나 조건만남 빙자(사기죄)와 몸캠피싱(협박죄)은 모두 금융사기로 분류되지 않는 경찰 수사 대상이어서 금감원의 구제를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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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 연령대도 60대 이상 고령층에서 30~40대 젊은층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1~9월 보이스피싱으로 5000만원 이상 피해를 입은 사람의 현황을 보면 30대(36.2%)가 가장 많았고 60대 이상(23.2%), 50대(14.2%)가 뒤를 이었다.

김용실 팀장은 “나는 신종 보이스피싱에 절대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과신은 금물”이라며 “일단 돈을 송금하라거나 현금을 찾으라는 전화를 받으면 무조건 금감원(1332)이나 경찰(112) 전화로 신고하는 게 최선의 예방책”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uni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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