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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한 바퀴 잘 돌았으니, 이젠 농사 배워볼까요

중앙일보 2016.01.20 01:56 종합 2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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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수집한 각종 기념 마그넷을 보여주고 있는 오권태(오른쪽)·배은임씨 부부. [사진 오종택 기자]


“100살까지 아내와 재미있게 살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10년 전 작성한 버킷 리스트 실행
58세 동갑내기 오권태·배은임 부부
은행 지점장 희망퇴직, 44개국 여행
“백세까지 아내와 할 얘깃거리 생겨”


 은퇴 후 세계일주.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버킷 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를 실현한 부부가 있다. 2014년 11월부터 1년간 세계 44개국을 여행한 오권태(58)·배은임(58) 씨 얘기다.

 오 씨가 버킷 리스트를 적기 시작한 건 10년 전인 40대 중반부터다. 그는 “은행에서 차장이 되고 매일 야근을 하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인생에 회의가 들었다”며 “그때부터 노트에 버킷 리스트를 적었다”고 말했다.

‘마당에 진돗개 키워보기’, ‘색소폰 불기’ 등 소소한 것에서부터 ‘은퇴 후 세계일주’ 같은 거창한 목표까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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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던 2014년, 오 씨는 30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버킷 리스트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그 전에 아내에게 은퇴하고 세계일주를 떠나고 싶다는 결심을 어렵게 털어놨다.

걱정과 달리 아내 배 씨는 “지금까지는 가족을 위해 살았으니 이제부터 당신을 위해서 살아라. 하루라도 빨리 출발하자”며 흔쾌히 동조했다. 세계일주를 위한 경비 7000만원은 퇴직금으로 충당했다.

 여행 동료를 더 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주변에 은퇴한 지인들에게 의사를 묻자 “막내가 고3이다”,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셔서 갈 수가 없다”며 주저했다. 마침 여행작가 학교에서 만난 임택(56)씨로부터 마을버스로 세계일주를 한다는 계획을 듣고 합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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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마추픽추.

 세계여행의 출발은 남미였다. 평택항에서 배편으로 보낸 ‘종로 12번’ 마을버스를 타고 페루 리마에서부터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를 거쳐 콜롬비아까지 4개월간 1만6700㎞를 여행했다.

하지만 버스가 잦은 고장으로 멈춰서면서 일정이 점점 지체됐다. 오 씨는 결국 일행과 헤어지고 아내와 둘이서 세계일주를 이어갔다. 체력적으로 힘든 여정이었다.

오 씨는 “여행을 멈추고 훗날을 기약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여기서 멈추면 시간과 세월이 또 도전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오 씨 부부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을 거쳐 지난해 11월 한국에 도착했다.

 오 씨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열차가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를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씩 쳐다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오씨는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아내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라며 “남은 인생을 보내면서 아내와 할 얘기가 그만큼 많아졌다”고 했다. 배씨 역시 “은퇴 후에 부부끼리 손잡고 떠나는 여행은 단 하루라도 좋다”고 말했다.

 오 씨 부부의 남은 버킷 리스트는 ‘전원생활’이다. “장사나 사업을 한다며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기보다는 조용한 곳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둘은 오는 3월부터 전북 순창군의 귀농학교에 입학해 농사를 배울 계획이다. 오 씨는 “내 인생의 마지막 버킷 리스트는 시골 이장이 돼서 가장 잘 사는 마을을 만들고 아내와 함께 즐겁게 봉사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글=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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