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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에서 기예로… 현대 바둑의 융성 이끈 ‘결정적 포석’

중앙선데이 2016.01.17 00:33 462호 26면 지면보기

1924년 일본기원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기사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인물이 혼인보 슈사이 명인. 다섯 번째가 오쿠라 기시치로 남작. [일본기원]

일본기원 건물



2000년 월간 『바둑』 1월호는 20세기 10대 사건을 특집으로 기획했다. 그 중 하나로 꼽은 것이 일본기원의 설립이다. 나머지는 신(新)포석 혁명, 인터넷 혁명, 한국기원 설립, 응씨배 창설 등이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반상(盤上)의 향기] 일본기원의 설립

“현대 바둑의 융성에는 일본기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기재(棋才)들에게도 성장의 터전과 자양을 제공해 주었다. 또 오늘날 바둑이 극동 지역을 벗어나 미국과 유럽·남미 등지에서 굳게 뿌리를 내리고 성행하게 된 것도 그 대부분이 일본기원의 공로였다.”



19세기 말 한·중·일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 들어갔다. 격렬한 정치·경제적 변화를 맞았다. 사회가 격변하면서 전통적인 가치는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조직체(organization)의 등장과 확산은 그 대표적인 현상. 기업은 물론이고 정당과 노동조합, 학교 등과 같은 다양한 조직체가 사회에 널리 퍼졌던 것이다. 바둑도 그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냈다. 일본기원과 한국기원이 바로 그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문에 바둑 실려바둑으로 먹고 사는 일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중국엔 ‘기대조(棋待詔)’가 있었다. 당나라 때부터 한림원에 바둑 고수를 여럿 두어서 황제의 부름을 기다렸다. 20세기 초 고수여(顧水如)나 유창화(劉昌華) 같은 고수들은 바둑을 가르치고 내기로 생활을 했다. 고수여는 청나라 말 안휘파(安徽派) 군벌 단기서(段祺瑞)와 바둑을 두어 일본 유학 경비를 얻기도 했다.



일본은 16세기부터 국가의 녹봉에 기댔다. 물론 녹봉 자체는 얼마 되지 않는다. 기사들은 유력자의 후원과 부유한 상인들을 가르치면서 살았다. 구한말 조선의 국수들은 가난했다. 권력자와 재력가에 기댔고 내기로 생활했다. 1861년 일본엔 막부(幕府) 체제가 무너지고 근대 국가 형성 과정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났다. 막부에 기댔던 바둑 4대 가문은 무너졌다. 다행히 세상이 안정되면서 1878년부터 신문이 바둑을 게재하기 시작했고 호엔샤(方圓社)가 1880년부터 면장(免狀ㆍ단위 인허장)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호엔샤는 18대 혼인보(本因坊)였던 슈호(秀甫)가 가문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뛰쳐나가 세운 조직이었다. 면장은 돈이 되는 일이었다. 2000년대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9단이 개인적으로 면장을 판 적도 있는데 일본기원은 제명으로 대응했다. 오늘날에도 면장은 일본기원의 주 수입원이다.



혼인보와 호엔샤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둘은 같은 뿌리라 기사들은 이리저리 휩쓸렸다. 혼인보 슈사이(秀哉)를 보자. 그는 젊은 시절 호엔샤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방랑 바람이 나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미국행도 시도했지만 좌절되었다. 그래, 김옥균에게 청을 넣어 혼인보 슈에이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 후 홀연히 안목이 열려 명인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바둑은 수입도 얼마 되지 않았다.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의 경우 열네 살에 도쿄에 올라 와서는 처음엔 씨름꾼 합숙소에서 지냈다. 스승인 스즈키 타메지로(鈴木爲次郞) 6단도 하숙을 했기 때문이다. 호엔샤에서 공부하는 소년들은 말똥 줍는 직업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내기바둑이 성행했기에 애기가의 눈에 기사들은 때로 질 낮은 내기꾼으로 비쳤다. 자칫하면 잡기로 끝날 판이었다. 선구자가 없지는 않았다. 구보마쓰 가쓰키요(久保松勝喜代) 6단은 관서(關西) 바둑계의 왕자였지만 1921년 아끼는 제자 셋을 도쿄로 보냈다. 무라시마 요시노리(村島誼紀)는 혼인보 가문에,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는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6단에게, 기타니는 스즈키 6단에게 맡겼다. “앞으로 대동단결할 날이 올 것이므로 그때를 대비하자.” 안목에 비해 힘은 부족했다.



 

슈사이 명인(오른쪽)과 대국하는 우칭위안 소년.



승단대회 열고 기사들 수당도 지급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바둑계는 무너지는 세상을 보면서 자신들도 산산조각날 수 있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바둑계 통일은 절실했고 또 그것만이 돌파구였다. 주도 인물은 일본 재계의 거물 오쿠라 기시치로(大倉喜七郞) 남작이었다. 그의 생각은 이랬다. 신문이 바둑을 게재해 바둑이 일어났다. 바둑이 영화 다음으로 국민들의 취미가 됐지만 체계적인 공급 단체가 없다. 시장경제니까 전통을 기반으로 전문가 집단을 만들자. 그래야 정체성(identity)이 분명해지고 바둑을 도박으로 오인하는 사회의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1924년 5월 오쿠라는 바둑계 대동단결을 제창했다. 7월에 일본기원을 발족시켰고 10월에 기관지 월간 『기도(棋道)』를 창간했다. 새로운 승단제도를 세워 승단대회를 열었다. 기사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단(段) 수당도 지불했다. 단 수당은 ‘단십(段十)’이라 해서 초단 10원, 2단 20원 하는 식으로 단위에 비례했다. 40원이면 대졸 회사원의 초임보다 조금 많았다. 막부 시절엔 명인의 권위에 의존해 면장이 발행되었다. 하지만 이젠 조직이 명인의 권위를 대신했다. 승단대회는 기존의 권위를 날려 보냈다.



 

기보 우칭위안이 슈사이 명인을 상대로 흑1, 흑3, 흑5를 두어 바둑계를 발칵 뒤집었다.



1933년 혼인보 슈사이 명인은 나이 환갑이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2만호 발행 특별행사로 명인의 환갑 기념 바둑을 기획했다. 명인은 이제 겨우 21살인 우칭위안(吳淸源)과 바둑을 두어야 했다. 피곤한 일이었다. 우칭위안이 세칭 ‘파천황’의 포석(기보의 흑1, 3, 5가 그것이다)을 시도했다. 다행히 두 집을 이겼지만 곤욕을 치렀다. 신구 대결 등 이름은 좋으나 벌써 권위는 물 건너갔다.



비슷한 시기에 우칭위안과 기타니가 신포석을 들고 나와 바둑계는 기존의 권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1939년 슈사이는 혼인보 이름을 마이니치(每日)신문에 거액에 팔았다. 뒷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예(藝)가 합리성에 의해 자리를 잃고 있다”고 슬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인보전은 구습의 타파를 앞당겼다. 제한시간과 덤을 두었고 1~2년마다 도전자 선발 시합을 개최해 매년 혼인보를 새로 정했다. 승부 방식의 혁신이 곧 승부 세계의 혁신이었다.



 



우칭위안 일본 데려오자 인기 급상승일본기원이 시장에 바둑을 팔기 위해서는 정체성의 혁신이 필요했다. 기예(技藝)로서의 바둑을 확립했고 내기는 점차 사라졌다. 중국으로 무대를 넓혀 1928년엔 천재 우칭위안을 데려왔다. “바둑에 국경이 없다”는 신조는 한편으로는 기예의 속성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것은 조선과 대륙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일본 정치경제의 확산과도 부합되는 말이었다.



 

일본기원 발행 잡지. 『난가(爛柯)』(오른쪽)와 『기도(棋道)』.



우칭위안을 데려온 일은 큰 성공이었다. 우칭위안이 창안한 신포석과 우칭위안의 10번기는 바둑의 인기를 크게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1933년 신포석을 발표한 책 『신포석법』은 발간한 그 해에만 무려 5만 권이 팔려나갔다. 일본기원은 모든 실험을 다 했다. 바둑을 연극 무대에 올리기도 했고 9줄 바둑과 15줄 바둑, 상담 바둑도 실험했다. 다면기를 일상적인 지도방법으로 만들었다. 책 발간은 일본기원이 특히 노력한 분야로 실로 엄청난 숫자의 책을 발간했다. 영문 잡지 『난가(爛柯)』도 발행했다. 20세기 후반 한국과 중국이 실력으로 일본을 따라잡는 데에는 일본 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책은 열려 있었다.



일본기원은 바둑의 국제적 보급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훌륭한 인물도 많았다. 제3기, 제4기 혼인보였던 이와모토 카오루(岩本熏) 9단은 독일과 브라질에 바둑회관을 짓는 등 지금 돈으로 100억원이 넘는 사재를 바둑 보급에 쏟아부었다.



기원의 흥망은 일본 경제의 흥망과 궤를 같이 했다. 45년 5월 미군 B-29 폭격으로 일본기원이 소실됐다. 가을 승단대회는 중단됐다. 일본기원을 떠받친 재계는 재력을 상실했고 신문도 지면을 줄였다. 위기였다. 종전 후인 46년 1월 일본기원은 이와모토의 집을 임시 사무실로 정하고 4월에는 승단대회를 재개했다. 9월에는 지면이 30페이지로 줄어들었지만 『기도(棋道)』도 복간했다. 회관 건축 후원회를 발족해 원로기사들이 직접 모금에 나선지 1년 만에 목표액을 초과해 450만원을 모금했다. 소실된 회관의 대지 판 돈을 합해 다카나와(高輪)에 2층 목조 건물을 지었다.



위기는 내부에서도 왔다. 일본에는 도쿄 중심 관동과 오사카 중심 관서의 지역 대립의식이 있었다. 오사카의 관서기원은 일본기원 산하지만 신분과 처우 면에서 열악했다. 불만이 높았다. 50년 마이니치 신문은 갈등이 쌓이는 것을 보고 이때다 해서 동서대항전을 기획했다. 기획은 큰 인기를 끌었다. 도쿄와 오사카는 대표를 12명씩 출전시켰다. 서로 못 봐 주겠다며 감정 섞인 바둑을 두었다.



50년 혼인보 하시모토가 일본기원을 탈퇴하면서 관서기원 독립을 천명했다. 혼인보는 일본 제1의 권위를 가진 타이틀. 그런 혼인보가 일본기원 손에서 멀어진 것이었다. 오사카 경제계가 관서기원을 후원했고 하시모토가 조직을 이끌어갔다.



 



45년 미군 폭격으로 일본기원 소실도일본경제가 성장을 거듭한 것은 일본기원의 배경이었다. 인물이 있었던 것은 복이었다. 신포석의 탄생은 철학의 행운이었다. 바둑을 기(技)가 아니라 기예로 만든 것도 시대와 잘 들어맞았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일본기원은 젊은 세대를 바둑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다. 바둑 인구는 900만에서 250만으로 줄어들었다. 잡지와 신문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재정도 어려워졌다. 세상의 변화에 일본기원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국과 중국에 비해서 약해진 실력도 문제다. 바둑의 수법은 공공재. 일본의 축적된 지식에 올라탄 한국과 중국은 이제 승부에서 일본을 넘어섰다. 일본기원의 역사적 역할은 끝난 것인가. 철학은 쇠잔했고 안목도 지쳤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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