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린썬 “끝까지 저항”… 장제스에게 비장한 유훈

중앙선데이 2016.01.17 00:24 462호 29면 지면보기

항일전쟁 시절 국민당과 민주세력, 공산당 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국민참정회 회의장에 도착한 국민정부 주석 린썬(가운데). 1941년 11월 17일 전시 수도 충칭. [사진 김명호]



1937년 11월 16일, 수도 난징(南京) 철도부 방공호에서 국방최고회의가 열렸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가 입을 열었다. “3년간 준비해온 일을 실현할 때가 왔다. 국민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이전한다. 동지들은 주어진 직분에 전력을 다해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61-

그날 밤, 국가원수였던 국민정부 주석 린썬(林森·임삼)은 충칭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경호원 230명과 100여 명의 군악대, 휘하 관원들에게 행장을 수습할 것을 지시한 후 장제스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후 그곳으로 가겠다. 할 말이 있다.” 평소 린썬은 장제스가 무슨 말을 하건 듣기만 했다.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적도 없었다.



이날 따라 린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언이라고 해도 좋을 말을 남겼다. “나는 고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 떠나면, 살아서 난징 땅을 밟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일으킨 것이 아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다. 너희들의 항전(抗戰)은 도처에 어려움이 잠복해있다. 극한상황에 처해도, 끝까지 저항해서, 저놈들을 이 땅에서 내 쫓아라.” 재산 처리도 당부했다. “젊을 때부터 골동 수집에 열중했다. 모두 박물관에 기증해라. 소장품인 서화와 서적, 불경들은 도서관으로 보내라. 나는 자손이 없다. 배우자도 세상 떠난 지 오래다. 수중에 있는 돈 6만원을 양자와 양손에게 주고 싶다.”



허리를 꼿꼿이 편 장제스는 고개를 숙인 채 듣기만했다. 린썬은 국가은행에 예치해둔 50만원의 뒤처리도 당부했다. “전쟁 중이라도 교육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매년 나오는 이자로 과학도를 양성했으면 한다. 건장하고, 고전교육 제대로 받은 자연과학도들을 선발해 미국 유학을 보내라. 나라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서 보내라.” 꼭 다문 입술에 힘을 더한 장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린썬의 마지막 말에 장제스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거렸다. “뜻을 세웠으면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향해 나아가라. 나는 날이 밝으면 쓰촨(四川)으로 떠나겠다.” 이튿날 새벽 린썬은 난징을 떠났다. 송별의식이나 성명서 따위는 생략했다.



린썬 휘하의 정부관원은 1000명을 웃돌았다. 수행원의 회고를 소개한다. “한달 전부터 짐작은 했지만,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재력과 인력도 한심할 정도였다. 강제로 원칙을 정했다. 당장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몇 달치 봉급을 주고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땅덩어리가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해군부가 제공한 군함으로 충칭까지 9일이 걸렸다. 선상에는 정부의 중요 문건들이 가득했다. 주석에게만 독방을 제공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뒤엉켰다. 가족 동행은 허락하지 않았다. 주석은 하루에 한차례 배 안을 돌며 관원들을 격려했다.”



 

린썬의 훈시를 경청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수뇌들. 오른쪽 세 번째가 위원장 장제스. 네 번째는 부위원장 펑위샹(馮玉祥). 1937년 12월, 우한. [사진 김명호]



난징 출발 3일 후 우한(武漢)에 도착한 린썬은 국민정부의 충칭 이전을 전 세계에 발표했다. 목적과 이유가 명확했다. “오늘 국민정부는 전쟁에 적응하고, 장기적인 항전에 돌입하기 위해 충칭으로 이전한다. 우리의 지구전(持久戰)은 일본군이 한 명도 남김없이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한의 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쓰촨성 주석 류샹(劉湘·유상)도 성명서를 발표했다. “7000만 쓰촨인을 대표해 머리 숙여 환영한다.”린썬 일행은 12월 26일 충칭에 첫발을 디뎠다. 쓰촨왕(四川王)이나 다름없던 류샹의 성명은 효과가 있었다. 2만여 명이 부두에 나와 린썬을 환영했다. 류샹은 충칭 교외에 있던 사택까지 린썬에게 내줬다. 충칭 직업중학에 국민정부 간판이 큼지막하게 내걸렸다. 충칭 시민들은 머리가 복잡했다. 잘된 건지, 못된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2개월 후 류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독살설이 나돌았지만 유언이 공개되자 금새 수그러들었다. “민족의 생존과 쓰촨인의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적군을 국경 밖으로 내쫓지 않으면, 우리 쓰촨군은 하루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다.” 국민정부는 쓰촨을 항일의 후방기지로 내주고 사망한 류샹에게 육군 1급 상장을 추서했다. 장제스 다음가는 계급이었다.



류샹이 사망하자 장제스는 “쓰촨 통일에 성공했다. 항전의 기반을 이제야 마련했다”며 측근 장췬(張群·장군)을 쓰촨성 주석에 임명했다. 장췬은 쓰촨 출신이었지만 현지에 기반이 약했다. 배척 시위가 잇따랐다. 린썬의 충칭 입성 후에도 우한에 머무르던 장제스는 오판을 인정했다. 직접 쓰촨성 주석을 겸임하고 대리인을 충칭에 파견했다.



쉬저우(徐州)를 점령한 일본군이 우한을 압박하자 일선 지휘관들이 장제스에게 건의했다. “충칭으로 이동하지 않으려면 황하를 범람시키자.” 먼 옛날부터 흔히 하던 방법이었다. 충칭행을 머뭇거리던 장제스는 결단을 내렸다. 3개 성(省)의 20여 개 현(縣)이 순식간에 물에 잠겼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있었지만 일본군의 우한 공격은 지연시킬 수 있었다. 4개월 후 일본군이 우한 인근에 집결하자 장제스는 철수했다. 그래도 충칭에는 가지 않았다. 여전히 뭔가 찜찜했다. <계속>



 



김명호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