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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27)

중앙선데이 2016.01.17 00:03 462호 1면 지면보기

김홍도가 그린 ‘벼타작.’ 대동법은 농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담시키고 빈농에겐 면제해 주는 세법이었기에 조세 저항이 심했다(큰 사진). 오른쪽 작은 사진은 호서대동사목 표지와 호서대동절목 서문. “군자가 태어나 학문에 힘써 벼슬하는 것이 어찌 혼자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겠는가. 장차 그 뜻을 백성들에게 베풀려는 것이다”는 말이 적혀 있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27-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④ 현종 2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되었다가 효종 2년(1651)에 호서(湖西:충청도)에 확대 실시되었고 효종 9년(1658)에는 전라도 해읍(海邑:바다를 낀 읍)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효종 10년(1659) 호남 산군(山郡:내륙 군현)에도 실시하기로 했으나 그해 5월 효종이 급서하면서 무산된 것이었다.?



조세정의에 가까운 이 법은 양반 전주(田主)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조선의 개혁정치가들은 조광조가 그랬고 율곡 이이가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이 방안을 지지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은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 법을 실시했으나 종전(終戰)과 동시에 집중 공격을 받아 실각하고 이 법도 폐기되었다.?그러나 이 법에 대한 백성들의 희구가 컸기 때문에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된 이후 진통을 겪으면서 계속 확대 실시되는 과정을 걷고 있었다.?



소수 신료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현종 4년(1663) 3월 12일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다.?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태화·홍명하·허적 등 삼정승은 물론 송시열도 반대로 돌아섰다. 그래서 현종 6년(1665) 12월 27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은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명분으로 다시 혁파되고 말았다.? 김좌명을 비롯한 대신들이 재실시를 주장했고 호남 산간의 대동법은 현종 7년 말 다시 살아났다.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국을 초토로 만드는 현종 11~12년의 (1670~1671) 경신대기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종 시대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하던 기묘한 시대였다.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이란 형이상학적 문제를 가지고 격렬하게 논쟁했다. 반면 피지배 백성들은 개국 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흉년과 대기근(大饑饉:굶주림)에 시달렸다. 예송논쟁이 한창이던 현종 즉위년 6월 『현종실록』은 “봄부터 기근이 들어 상평청(常平廳)에서 3월부터 죽을 쑤어 기민들에게 제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종 재위 내내 계속된 대기근의 시작이었다.?문신들이 효종의 군비 강화 정책에 반대한 데는 흉년이 잇따르는데도 이유가 있었다.?



현종 2년(1661)?기근에 전염병이 더해졌다. 현종 2년(1661) 윤7월 당초 비변사 소속이었던 진휼청(賑恤廳)을 사실상의 상설기구로 독립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재해를 더 큰 재해가 덮고, 전염병을 더 센 전염병이 덮는 형국이었다. 국왕 자리는 바늘방석이었다.?

대기근-인생(58.5Χ95cm), 우승우(한국화가) 조선 왕조 후기에 굶주리던 백성의 형상. 현종은 재위 기간 내내 흉년에 따른 대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렸다. 거리에는 유리걸식하거나 굶어 죽은 시신이 즐비했다.



현종 9년(1668) 9월에는 말의 전염병이 크게 번졌으며, 소의 전염병도 유행했다.?그래서 현종 4년(1663) 9월 소의 종자가 끊길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소를 죽인 자’를 ‘사람을 죽인 자’의 형벌로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이때의 재변이 조선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이 시기를 소빙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현종 9년(1668) 10월 사은사 일행이 돌아와 청나라의 산동(山東)·강남(江南) 등 3개 성에 지진이 발생해 수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선도 몇 년째 집들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각지에서 발생했다. 사신들은 몽골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도 전했다.



재위 1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니 실로 재위 10년 동안 단 한 해도 기근이 없던 때가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시작되는 경신(庚辛) 대기근에 비하면 약과였다. 현종 11년(1670:경술년)·12년(신해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재난이 다가오고 있었다.?여기에 기상이변이 가세했다.?경기도 교하(交河) 등 9읍에서는 황충(蝗蟲)이 극성을 부렸다. 냉해와 한해 위에다 충해(蟲害)가 더해진 것이었다. 6월에는 태풍이 부는 풍해(風害)까지 기승을 부렸다. 기상이변은 전국적 현상이었다. 여기에 수해(水害)까지 덧붙여졌다. 길에는 집을 떠나 유리하거나 굶어 죽은 백성들이 즐비했고 “몇 년이 지나면 초목만 남을 것(『현종실록』 11년 9월 15일)”이라는 흉언(凶言)이 횡행했다. 실로 국망의 위기였다.?현종 11년(1670:경술년)∼12년(신해년)의 경신 대기근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변이었다.?한해(旱害:가뭄)·수해(水害)·냉해(冷害)·풍해(風害)·충해(蟲害)의 오재(五災)에 인간 전염병과 가축 전염병이 가세한 칠재(七災)였다. 여기에 겨울 혹한(酷寒)까지 팔재(八災)가 되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국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그는 현종 11년 7월 23일 “온갖 벌인 일들을 정지시키고 번잡한 비용을 줄여 오직 구황 정책에 전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고 건의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굶주린 백성 살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태화는 진휼청(賑恤廳)을 상시 가동하고 인상했던 관료들의 녹봉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닷새 후인 7월 2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재난대책회의가 열렸다.?임금은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금주했으며 백관은 봉급을 줄여 만든 비용으로 기민(饑民) 살리기에 나섰다. 병자를 치료하는 활인서(活人署)와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賑恤所)가 중심이었다.?현종 12년 1월 16일 선혜청·한성부·훈련원 세 곳에 진휼소를 설치했다. 한성부는 삼강(三江)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조석으로 진휼소까지 오기 어렵다면서 용산과 홍제원에도 진휼소를 설치했다. 지방 각 관아도 진휼소를 운영했다. 또 동소문 밖 연희방의 동활인서, 남대문 밖 용산강의 서활인서에서는 병자들을 치료했다.?진휼소 덕분에 무수히 많은 백성이 살아났지만 곡식이 부족해 무한정 운영할 수도 없었다.



마지막 방안은 청나라에서 곡식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종실록』은 “불가하다는 신하가 많아 서필원의 의논은 시행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굶주린 백성 앞에서도 이념을 앞세웠던 것이다.?대기근 앞에서도 당리당략을 앞세운 일부 무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기근 극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하늘이 왕조를 버린 듯한 천재(天災)가 왕조 타도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동법도 큰 역할을 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19호 2009년 6월 21일, 제120호 2009년 6월 28일, 제121호 2009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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