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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나도 그랬어…‘응팔’에 열광하다

중앙일보 2016.01.14 01:49 종합 2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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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드롬이란 말로도, 열풍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 출연자들은 모두 대세배우가 됐고, PPL(간접광고)로 등장한 제품은 모두 매출이 급상승했다. 배경음악은 음원 차트를 점령하고, 매 회 방송이 끝날 때마다 분석 기사가 쏟아진다. 현역 국회의원이 드라마의 결말과 관련한 촬영 상황을 트위터에 올렸다 사과하기도 했다. 시청률은 20% 미만이지만 엄청난 반향이다.

“서열 없는 따뜻한 세계에 힐링”
“나 닮은 평범한 캐릭터에 공감”
들국화·동물원·이문세 노래도 한몫


2016년을 사는 우리들은 왜 이토록 ‘1988’의 응답에 사로잡힌 걸까.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 원장,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등 세 명의 정신과 의사에게 그 이유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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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따뜻한 판타지 … 집단 퇴행·퇴영=현실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응팔’의 따뜻한 판타지 세계로 도망을 갔다. ‘금수저’ ‘흙수저’ 등 ‘수저계급’ 논란에 동네 서열, 외모 서열까지 따지는 피곤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

이나미 원장은 “집단 우울증에 빠질 것 같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말랑말랑한 곳을 찾아 숨어버린 셈”이라며 “일단 과거로 뒷걸음쳐 그곳에 안주하려는 퇴행·퇴영 현상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게 안주하기에 ‘응팔’은 더없이 따뜻하고 달콤한 세계다. 나쁜 사람도 없고 차별도 없다. 공부 못하는 애, 못생긴 애도 포용하며 서로 어울린다. 실제로는 과거에도 없었던 판타지 세계다. 하지만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가상의 고향을 만들고 그곳으로 돌아가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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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평범한 외모·고민 … 내 얘기 같아=‘응팔’에는 조각 같은 성형 미인이 없다. 출연 배우들의 외모는 대체로 평범하다. 쌍꺼풀 없는 ‘보통 사람’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허구 세계의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속 살아있는 사람들로 다가온다. 시청자들이 쉽게 각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이유다.

또 인물들이 잘난 체하지 않아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벼락부자 김성균·라미란도 친근한 이웃일 뿐이다. 전교 1등 아들 선우도, 사법고시 합격한 딸 보라도 자랑거리로 내몰지 않았다. 결점·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니 공감지수는 한층 더 올라간다.

에피소드들도 하나같이 평범하다. 속고 복수하고 재산 싸움하는 식의 평범한 사람들이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막장’ 요소가 없다. 열등감과 불안, 자신감 부족과 외로움 등 누구나 겪는 일상의 얘기다. 꼭 내 얘기 같아 감정이입이 쉽다.

 ③ ‘응팔’ 세대는 원래 말 많은 세대?=1980년대 대학을 다닌, 한때 ‘386 세대’라 불렸던 이들은 ‘가장 말 많은 세대’로 통한다. 하지현 교수는 “이들은 대학 시절 숱한 세미나를 통해 문화를 해석하는 훈련이 돼 있다. 당시 대학생은 공대생도 최소한 『철학에세이』는 읽었다”면서 “‘응팔’은 이들이 가장 그리워하며, 가장 그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시대를 그렸다”고 말했다.

1987, 88년은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의 시기였다. 민주화를 이뤘고, 올림픽을 치렀다. 좋아질 것이란 희망이 넘쳤다. 그 시기 청춘을 보낸 ‘응팔 세대’가 여론을 주도하는 오피니언 리더가 됐다. 이제 사회 주축이 된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으니, 더욱 말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④ 그 시절 가요의 힘=86∼88년은 가요가 대중음악의 중심이 된 변곡점으로 기록된다. 들국화와 동물원·부활, 이문세와 변진섭·나미 등이 활동하며 한국 가요사의 명곡들을 쏟아냈던 시기다. 그 이전엔 팝송이 대중음악의 중심이었다.

이 시절 대중음악들이 ‘응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의 추억이 없는 10∼20대들까지 사로잡을 만큼 음악 자체의 힘이 강렬하다. 1월 첫째주 음원사이트 소리바다 차트를 보면, 10위 안에 ‘응팔’ OST가 무려 6곡이나 포함돼 있다. 1위는 최호섭이 88년 발표한 ‘세월이 가면’의 리메이크 곡이다. 지난 8일 방송된 17회 덕선이 보라의 좁은 고시원 방을 보고 펑펑 우는 장면에서 흘러나와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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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⑤ 과거의 ‘긍정적’ 재구성 자극=‘응팔’은 시청자들이 자신의 과거를 훈훈하게 재구성하도록 자극한다. 과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현재·미래의 삶이 행복하다.

실제 과거가 어땠느냐보다는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실제보다 더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우울증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냥 내버려두면 과거의 나쁜 기억을 더 강하게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한순간의 마음의 상처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는 경우도 흔하다

. 윤대현 교수는 “시청자들은 ‘응팔’의 따뜻하고 유쾌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그리움에 빠져들고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면서 “과거의 미화는 정신 건강 측면에서 효과적인 힐링 솔루션”이라고 말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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