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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진격의 일본 기업’ … 한반도에 드리운 먹구름

중앙일보 2016.01.12 00:27 경제 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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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산업부장

아마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게 틀림없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얘기다. 일본은 한국 중국과 상대하는데 있어 미국의 전방위적 지원을 받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 덕분이다.

 아베의 필생 과업인 군대 보유와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의 개헌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북한의 4차 핵 실험이 분위기를 바꿔 놓고 있어서다. 북한의 위협을 근거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개헌 작업도 급물살을 탈 수 있다.

 아베노믹스도 순조롭다. 지난 4일 아베 총리는 새해 기자회견에서 “물가가 상승 추세에 있다. 정부와 일본은행이 한 몸이 돼 디플레이션 탈피를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진격의 일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건 ‘진격의 일본 기업’이다.

 지난해 5월 중국 옌타이의 LG이노텍 공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생산된 카메라 모듈은 화웨이 등 중국 업체의 스마트폰에 장착된다. 그런데 카메라 모듈에서 가장 중요한 부품인 CMOS 이미지센스(CIS)란 반도체는 일본 소니의 제품이었다. “CIS 분야에서 소니는 점유율이 40%에 이르는 절대 강자”라는 LG이노텍 관계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몰락한 전자 왕국이 이렇게 명맥을 유지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음은 6~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6’에서 증명됐다. 소니는 스마트폰·카메라·스피커·게임기 등 다양한 신제품을 대거 선보였다. 특히 두께를 줄이고 색상의 깊이를 끌어올린 4K LCD TV는 ‘TV 명가 소니’의 부활을 예고했다. 소니는 차세대 기술인 ‘백라이트 마스터 드라이브(Backlight Master Drive)’를 이용해 4000니트의 밝기를 구현했다. 4000개의 촛불이 한꺼번에 빛을 내는 밝기다. 국내 제조사가 선보인 제품보다 4배 밝다. 소니가 강점인 이미지 센서 기술을 활용해 색 재현력과 명암비도 개선했다. 파나소닉·니콘 등도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한때 일본 전자산업이 기우뚱한 것은 사실이다. 금융위기 이후엔 주요 일본 전자업체의 영업이익을 다 합쳐도 삼성전자 한 곳에 미치지 못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겪고도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다. 제조업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이 다소 늦었다 했는데 옛날 얘기다.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빅데이터 활용 정도에선 한국이 따라가지 못한다.

 트레저데이터의 이은철 한국지사장은 “빅데이터를 활용한 비즈니스 모델 개발 정도에서 일본을 100점으로 본다면 한국은 30점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현재가 이러니 미래 그림이 어떻게 그려질지도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중앙일보는 한국공학한림원·맥킨지와 ‘한국 경제의 신성장 동력 10대 산업’을 선정했다. 로봇·무인항공기·핵융합 등 당장 우리의 기술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시장이 커질 것에 대비 반드시 따라잡아야 할 산업이다. 한데 이들 분야의 선두 기업 다수가 일본 기업이다.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깊고 넓은 기술 수준을 갖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20년간 잠자던 일본을 깨운 것은 아베노믹스가 아니라 일본의 산업 과학계에 폭넓게 자리한 기술이다. 혹독한 구조조정 속에서도 오랜 시간 연마한 기술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잃어버린 20년에 빠져든다면 무엇이 우리를 깨울 텐가.

 여전히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불편하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우경화와 부활한 거대 일본 기업이 결합해 다시 한반도로 질주하는 상상을 해본다. 트라우마로 인한 피해 망상이겠거니 하지만 가끔씩은 섬뜩하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기술의 일본’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 일본의 실패도 분석해야 한다. 기술의 일본이 왜 ‘창조의 미국’은 따라잡을 수 없었는지 말이다. 일본은 늘 우리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었다. 한 번 더 일본을 이용하자.

김준현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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