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 직장·부서에 가면 3개월은 헤매는 게 정상

중앙일보 2016.01.09 01:56 종합 13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2016년, 아직 하얗게 빈 달력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 설레는가, 아니면 불안한가. 연초엔 많은 사람이 인생의 새 단계로 진입하는 출발선에 서게 된다. 승진이나 회사 내 부서 이동, 이직·진학·이사 등으로 낯선 환경과 직면해야 한다. 달라진 주변 환경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마음도 일년 중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인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 더 열심히’가 지상과제가 된 성과주의 사회에서 ‘빠른 적응’은 중요한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운동화 끈을 졸라매기 전 한번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갑자기 근육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면 쥐가 나듯 새 환경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세우면 마음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적응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정서적·육체적 이상 증상이 나타나는 ‘적응장애(adjustment disorder)’다.

연초에 많이 겪는 ‘적응장애’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여·39)씨는 업무 능력이 탁월한 데다 대인관계까지 좋아 조직에서 승승장구해 왔다. 하지만 최근 부서를 옮기며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시간엔 두통에 시달렸다. 조금만 먹어도 속이 더부룩해 식사를 자주 걸렀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새 팀장과의 불화였다. “업무도 낯선데 모든 사안에 수치를 들이대며 성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자신을 은근히 견제하며 다른 팀원을 감싸고 도는 태도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하는 고민에 시달리던 김씨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적응장애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공익근무 중인 이모(22)씨도 최근 상사가 바뀌고 사무실 분위기가 경직되면서 매사에 의욕이 없고 피로도 자주 느꼈다. 심리검사상 뚜렷한 불안장애나 우울장애 상태는 아니었지만 적응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으로 판단돼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허모(32)씨는 입사 후 처음으로 부서를 옮기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업무를 맡게 됐다. 생소한 일이라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후배들에게까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허씨는 “자려 누우면 낮에 한 실수가 자꾸 떠오르고 내일은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해진다”고 털어놓았다.

 
기사 이미지
 ◆적응, ‘피로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숙명=적응장애는 우울증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불안·불면·식욕저하·두통 등 증상은 비슷하지만 적응장애의 경우 증세가 명확하게 ‘환경의 변화’에 의해 나타나고 스트레스를 주던 환경이 없어지면 6개월 내에 급격히 호전된다. 기질적인 요인에 크게 좌우되는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보다 증세도 덜 심각하고 치료도 비교적 쉽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사람의 기질을 밭, 주변 환경을 날씨라고 한다면 적응장애는 밭의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은데 혹한과 가뭄 등 기상이변으로 농사를 망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적응장애는 “이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다. 서구 의학계에서도 적응장애가 정신적 문제로 인지되기 시작한 것은 20~30년밖에 되지 않는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노동 환경이 변화하면서 사람들은 실직과 이직, 파견 등 새롭게 적응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이전 세대보다 자주 내몰리게 됐다. 경쟁과 성과를 강조하는 분위기도 사람들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대사회는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한다.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자신도 타인도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남의 눈을 의식하고 평가에 민감하다”고 적응장애 환자가 늘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오강섭 성균관대 의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한국에는 아직 관련 통계가 없지만 외국의 경우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의 5~20%가 적응장애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적응 문제는 애당초 적응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긍정적이고 성취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도 자주 발생한다. 업무 능력에 대한 과신과 강한 책임감,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가 마음을 위축시키고 초조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일본 정신과 전문의 오카다 다카시(岡田尊司)의 『나는 왜 적응하기 힘들까?』(을유문화사)에 따르면 사회생활에서 나타나는 적응 장애는 ▶담당 업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달라지면서 과도한 피로를 느끼는 ‘용량초과형 적응장애’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주체성 침해형 적응장애’ ▶리더나 책임자가 되면서 아래 사람에게 휘둘리거나 결정에 곤란을 겪는 ‘관리직형 적응장애’ 등으로 나뉜다.

 성적과 규율을 강조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아이도 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박모군은 지난 가을부터 몸이 아프다며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상담에서 박군은 몇 개월 전 이사와 함께 학교를 옮긴 후 친구들이 걸어온 짓궂은 장난 때문에 불안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신석호소아청소년정신과 신석호 원장은 “문제가 없던 아이들도 새로운 환경에서는 민감해진다. 형제 없이 과보호를 받으며 자란 경우 낯선 상황의 불편함을 견디는 힘이 약해질 수 있다”고 했다.

 ◆‘3개월의 법칙’을 기억하라=적응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적응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현 교수는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새로 옮겨간 곳의 기준이 다를 경우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믿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인간은 주변에 자신을 맞춰 가는 ‘코핑(Coping·대처) 매커니즘’을 작동시키게 된다. 영국 심리학자 필리파 랠리의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이 새로운 습관을 받아들이는 데는 평균적으로 84일이 걸린다. 즉 3개월 정도는 헤매는 게 정상이라는 이야기다.

 생활리듬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은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건강의학과 교수는 “이직한 회사에 빨리 적응하겠다고 밤 12시에 퇴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면 체력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적응은 더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동료들에게 적극적으로 묻고 배우며 자신만의 ‘적응 스트레스 관리법’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 직장을 옮긴 민호기(35)씨는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터득한 경우다. 컨설팅, 홍보, 보험 영업 등 옮긴 회사마다 업종은 달랐지만 어느 회사에 가든 먼저 사내 교육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동호회에 가입했다. 민씨는 “동호회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공식·비공식적으로 업무를 배우고, 정수기 교체처럼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했다. 기존 방식을 존중하며 천천히 다가가면 적응은 어렵지 않더라”고 했다.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에게도 해법은 비슷하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한 명의 친구를 사귀는 데서 시작해 점차 친구관계를 넓혀 나간다. 운동·미술·음악 등의 예체능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가 갑자기 학교에 가기 싫어하거나 우울 증세를 보일 경우 인내심을 갖고 아이와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신석호 원장은 “낯선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예측하고 아이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도록 도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S Box] 생텍쥐페리·피카소·모파상도 학창시절 적응장애 겪어
 
기사 이미지

왼쪽부터 생텍쥐페리, 피카소, 모파상.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 중에도 ‘적응’을 힘들어했던 이들이 여럿이다. 『어린왕자』를 쓴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는 어린 시절 교풍이 엄격한 예수회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주의가 산만해 신부들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학습장애가 있어 단순한 계산과 글자 읽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부모와 떨어지는 것을 불안해했고,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행히 두 사람에게는 단점을 질책하기보다 믿고 기다려 준 사람들이 있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풍이 자유로운 스위스 학교로 편입시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피카소의 아버지 역시 그림을 그릴 때만 행복해하는 아들을 야단치지 않고 너그럽게 지켜봤다.

적응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진짜 재능을 찾아낸 이들도 있다. 『여자의 일생』을 쓴 프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1850~1893)은 어린 시절엔 학교 생활에, 성인이 돼선 공무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업무 시간 이외에는 늘 소설을 썼다. 서른 살에 공무원으로 일하며 쓴 소설 『비곗덩어리』로 성공을 거둔다. 뇌신경과학의 기초를 세워 노벨상을 수상한 스페인 뇌과학자 산티아고 라몬이카할(1852~1934) 역시 어린 시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비행을 일삼던 소년이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이발소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우연히 해부학을 접하면서 그 분야에 매료됐다.

이영희·임선영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참고 : 오카다 다카시, 『나는 왜 적응하기 힘들까?』(을유문화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