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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치 치료, 스케일링, 틀니 해주자 … 칠순의 뜨엉 할머니 “까먼,까먼”

중앙일보 2016.01.09 01:48 종합 17면 지면보기
베트남 최대 도시 호찌민에서 북동쪽으로 700㎞ 떨어진 해안 지역 꾸이년(Quy Nhon)시. 새해 첫날인 지난 4일 한양대 동문 및 교직원·학생으로 꾸려진 ‘함께한대’ 봉사단(단장 김용수 원자력공학과 교수)이 이곳 외곽 떠빈면 주민들을 위한 해외봉사 활동에 나섰다. 도심에서 한 시간을 버스로 달려 오전 8시쯤 떠빈면 보건소에 도착한 이들 일행을 맞은 건 120여 명의 현지인들. 짚으로 만든 원뿔형 전통모자 논(non)을 쓴 할머니 등 대부분이 노인층인 이들은 아침 7시부터 몰려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입구에는 이들이 타고 온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줄지어 늘어섰다.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터에 한국의 의사와 간호사 등으로 짜인 의료봉사단이 온다는 입소문을 듣고 이웃마을에서까지 몰려온 것이다.

[세계 속으로] 베트남 의료봉사 펼치는 ‘따이한’

 가장 인기를 끈 건 치과 진료다. 서울에서 공수해간 스케일링 장비 외에 틀니를 만들 수 있는 설비까지 갖춰 제법 그럴듯한 치과병원이 차려졌다. 손녀와 함께 이곳을 찾은 틴 뜨엉(71) 할머니는 썩은 치아를 뽑아내고 스케일링까지 받았다. 틀니까지 만들어 장착시키는 방법까지 알려주자 신기해하며 치료를 담당한 전공의 이성원씨에게 “까먼(감사합니다)”을 연발했다. 치과를 찾은 환자들에겐 치약과 칫솔·구강청결제가 선물로 제공됐다.

 치아와 함께 위염이나 척추 질환, 영양 부족 등의 질환도 많이 나타났다. 베트남 측 의료진을 대표하는 보딘록은 “어릴 적부터 더운 날씨에 논농사 등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현지 상황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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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한양대의 베트남 의료봉사 현장을 찾은 닝타이탄(5)과 할머니. 아직 말을 못한다는 탄은 청력 이상이나 발달장애가 의심됐다.


 이날 마지막 환자는 닝타이탄(5)이었다. 탄을 업고 나타난 할머니는 눈물까지 보이며 손자를 치료해 달라고 애원했다. 다섯 살이 됐는데 아직 말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베트남 의료 당국과 적십자사는 사전에 신청을 받은 주민 외에 추가 진료는 불허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한양대병원 정찬호 팀장이 나서 베트남 측을 설득했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인 나위진씨는 “진단 결과 청력 이상이나 발달장애가 의심된다”며 “베트남 의료 당국이 탄에 대한 정밀진료를 약속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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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교육봉사팀 오은진 교사가 베트남 어린이 손등에 그림을 그려넣고 있다.

 인접한 마을 문화회관 마당에서는 유아교육봉사팀이 무지개와 딸기·곰 모양의 페이스 페인팅을 아이들에게 해주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한양대 동문인 오은진 교사는 “방학을 이용해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됐다”며 “만국 공통어인 그림을 통해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몰려든 아이들마다 ‘MTP’라는 글자를 몸이나 장신구에 써 달라고 해 무슨 의미인지를 놓고 한동안 의문이 제기됐다. 꾸이년대 영문학과 학생의 통역으로 확인한 결과 요즘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베트남 남성 가수로 드러났다.

 진료를 위해 찾아온 주민들의 헤어스타일을 깔끔하게 해준 이·미용 서비스도 인기를 끌었다. 또 즉석에서 사진을 촬영해 액자에 담아주는 코너에도 줄이 늘어섰다. 봉사단 측은 현장을 방문한 주민 모두에게 2000달러를 들여 연유와 설탕, 홍삼캔디가 들어 있는 선물세트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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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간 해외 의료봉사를 해온 이영수씨가 7일 베트남 어린이들과 만났다. 이씨는 이번에 한양대 동문봉사단 이사직을 맡았다.

 17년 동안 해외 의료봉사를 해온 베테랑인 이영수 ㈜정화 대표이사는 동문 자격으로 이번에 처음 참여했다. 그는 4일 현지에서 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보건소 마당 돌의자에 앉아 환자들의 혈압을 재고 진료카드를 작성해 주는 등 묵묵히 의료봉사를 도왔다. 이날 저녁 때는 70여 명의 봉사단과 베트남 적십자사 관계자 등을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생일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튿날 기자가 찾아가자 “해외봉사 일정을 잡고 보니 우연히 겹친 것”이라며 “어려운 분들을 돕기 위해 모두 이국땅에서 고생하는데 내 생일을 챙길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1970년대 석유업계의 큰손이던 이종엽 경일석유 회장의 막내딸이다. 99년부터 열린의사회 측과 에티오피아·네팔·필리핀·몽골·레바논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해왔다. 2년 전에는 그 경험을 담은 책 『그들의 눈빛 내 가슴에』(나남)를 펴내기도 했다. 이 대표는 “북한 취약계층을 위한 의료봉사를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양대 측의 이번 봉사활동은 4일부터 8일까지 ▶의료 ▶유아 교육 ▶노인 섬김 ▶건축 등의 분야에서 진행됐다. 본래 지난해 여름 찾아올 예정이었지만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해를 넘겼다. 닷새 동안 모두 1300여 명의 환자를 돌봤고 3000달러 상당의 의약품이 제공됐다. 사랑의 집 지어주기 행사를 위해 2000달러가 쓰였고, 유치원 식수 환경 개선에 1000달러가 들었다. 봉사단 측은 이와 별도로 7500만원의 기부금으로 마을 체육문화센터를 지어 6일 개관 행사를 열었다.

 꾸이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해 온 이우석 선교사는 “베트남 사람들은 한류 문화를 즐기고 이 같은 봉사활동에 감사함을 느낀다”며 “하지만 여전히 베트남전의 응어리가 남아 있는 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이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데 한국 의료진과 청년 세대들의 이번 봉사활동이 그 첫 발걸음이 될 것이란 기대다.

[S Box] 일부 주민들 “맹호라는 말 들으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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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이년시 외곽 고자이 마을에 세워진 베트남 민간 희생자 위령탑의 모자이크 벽화. 1966년 2월 한국군 맹호부대에 의해 주민 380여 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베트남 당국의 입장이 반영된 그림이다.


꾸이년은 1965년 10월 베트남에 파병된 맹호사단이 주둔해 베트콩 3개 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 중 하나다. 떠빈면 면사무소에서 4㎞ 떨어진 고자이 마을 어귀에는 66년 2월 26일 전투 때 희생된 주민 380여 명을 위한 위령탑이 서 있다. 과거 야트막하게 지었던 걸 누각까지 갖춘 20m 높이로 최근 새로 지은 것이다.

탑 뒤편 모자이크 벽화에는 맹호부대 마크를 단 한국군이 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집과 마을을 불태우는 끔직한 모습이 형상화돼 있었다. 이 사건을 한국군 측의 ‘학살’로 규정해 온 베트남 당국은 다음달 26일 50주기 위령제를 성대하게 준비 중이라고 한다. 아직도 ‘맹호’란 말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주민이 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참전 군인들은 베트남 측 주장이 과장됐다고 반박한다. 또 게릴라전을 펼치며 주민으로 위장해 있던 베트콩들에 의해 희생된 국군장병들의 당시 절박했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베트남전 때 맹호부대 장교로 꾸이년에 주둔했고 현재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 중인 이우석 선교사는 “사건의 진실은 더 규명돼야 하겠지만 꾸이년 주민의 희생을 어루만져줄 우리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베트남전이 한·베트남 모두에 남긴 트라우마는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었다.

꾸이년(베트남)=글·사진 이영종 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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