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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리포트] 함께라서 외롭지 않은 소녀상의 ‘긴 하루’

중앙일보 2016.01.07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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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위치한 평화의 소녀상. 2011년 수요집회 1000회를 기념해 김운경·김서경 부부 작가가 제작했다.

서울 중학동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12월 수요집회 1000회를 기념해 세워졌습니다. 지난달 28일 한일 양국 간 위안부 합의 이후 소녀상 이전 문제가 불거지자 대학생 20여 명이 이전을 반대하며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본지는 6일 오전 0시부터 24시간 동안 소녀상 주변을 관찰해보기로 했습니다.

수천 명의 시민들과 함께해서 외롭지 않았던 소녀상의 24시간을 글과 사진, 영상으로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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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새벽.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1주일째 노숙농성중인 대학생들이 모여 가수 이문세의 노래 ‘소녀’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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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새벽.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1주일째 노숙농성중인 대학생들이 모여 가수 이문세의 노래 ‘소녀’를 부르고 있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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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4도의 칼바람이 매섭게 불었던 지난 6일 0시.

평화의 소녀상 주변에서 가수 이문세의 노래 ‘소녀’가 흘러나왔다. 잔잔한 기타 반주에 맞춘 노래가 절정을 향해갈 때쯤 침낭 속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소녀상 앞에 둘러앉은 학생 십여명의 노래는 한밤의 적막함을 가르며 주변에 온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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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전 3시. 노숙농성중인 대학생들이 침낭 속에서 잠든 모습. 평화의 소녀상 양 옆으로 20여개의 침낭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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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전 3시. 노숙농성중인 대학생들이 침낭 속에서 잠든 모습. 평화의 소녀상 양 옆으로 20여개의 침낭이 놓여 있다.

이들은 지난달 30일 수요집회 이후 줄곧 소녀상 옆에서 노숙농성 중인 대학생들이었다. 2시간 30분쯤 지났을까. 한 여학생이 연신 기침을 하며 “날씨가 너무 추워서 몸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자 이들은 노래를 멈췄다.

잔뜩 굳은 몸을 일으킨 학생들은 각자의 핫팩을 들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소녀상 양 옆으로 번데기 모양의 침낭 20개가 일렬로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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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전 3시. 일본대사관과 평화의 소녀상 주변에 배치된 50여명의 경찰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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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전 3시. 일본대사관과 평화의 소녀상 주변에 배치된 50여명의 경찰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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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시 학생들이 모두 잠들자 소녀상 주변엔 경찰만 남았다.

지난달 30일 소녀상을 지키던 대학생들이 일본대사관에서 기습 시위를 벌인 이후 경찰은 소녀상 주변에 50명의 경찰관을 배치했다.

이곳을 지키는 경찰관들의 심정은 복잡하다. 붉은 경광봉을 들고 소녀상 앞을 지나던 한 경찰관은 “소녀상을 지키고 싶은 건 나도 똑같다”라며 “이 추위에 노숙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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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전 7시. 대학생들이 잠에서 깨 침낭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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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침낭 속 대학생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냉기 가득한 아스팔트 위에서 잠든 탓에 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이들은 뻣뻣해진 몸을 움직여 침낭과 담요를 재빨리 정리한 뒤 주변의 쓰레기를 치웠다.

이후 소녀상 뒤편으로 이동해 쓰레기를 유리ㆍ플라스틱ㆍ일반쓰레기로 나눠 분리수거했다. 쓰레기통 위에는 “농성장의 청결ㆍ깔끔은 우리의 얼굴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밤샘 노숙농성을 마친 학생들이 짐을 정리해 소녀상을 떠나자 새로운 대학생 10여명이 도착했다. 대학생 황모(23ㆍ여)씨는 “밤새 이곳에 있던 친구들은 집에 가서 씻고 밥을 먹고 있을 것”이라며 “엄격하게 시간대별로 나눠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순번을 돌아가며 소녀상을 찾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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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수요집회엔 각계 시민단체 회원들과 시민 등 1500여명이 참석했다. 경찰은 수요집회가 열리는 평화의 소녀상과 일본대사관 주변에 총 800여명의 경찰 병력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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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에 참석한 아이가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며 사진 찍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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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수요집회에 참석한 1500여명의 시민들.


수요집회가 예정된 낮 12시가 되자 평화의 소녀상 주변으로 1500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100여명의 취재 기자들까지 합세하자 소녀상 주변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붐볐다.

경찰은 12개 중대 8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소녀상 주변에 통제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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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가 끝난 뒤 평화의 소녀상 사진을 찍는 100여명의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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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손을 잡고 수요집회에 참석한 어린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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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수요집회는 끝났지만 시민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김명희(43)씨는 각각 9세,11세인 두 아들과 함께 소녀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온 ‘평화나비 대전행동’ 회원 30여명은 번갈아가며 소녀상의 손을 잡았다.

서울 창동에서 부모님과 함께 왔다는 한 초등학생은 소녀상을 쓰다듬으며 “이 소녀상은 왜 맨발이에요”라고 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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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후 2시 30분.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평화의 소녀상으로 몰려들며 경찰과 충돌이 발생했다.


시민 100여명이 소녀상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 사이“한일합의 인정하라”는 고함이 울려퍼지며 70~90대 할아버지ㆍ할머니들이 몰려들었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소녀상으로 몰려든 건 어버이연합 회원 20여 명이었다.

저지선에 막힌 또 다른 10여 명의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피켓을 들고 시민들과 경찰을 밀치며 몸싸움을 벌였다. 이들은 “우리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경찰은 “혹시 싸울까 봐 그런 것이니 시민들이 다 물러날 때까지만 잠시 기다려 달라”며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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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옆에 마련된 ‘위안부 롤링페이퍼’. 수요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위안부 롤링페이퍼’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응원의 메시지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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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옆에 마련된 ‘위안부 롤링페이퍼’. 수요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위안부 롤링페이퍼’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응원의 메시지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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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에 참석한 백정미(28)씨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머리에서 붉은 봉선화 꽃 한 줄기가 피어 오르는 그림을 그렸다.


어버이연합의 시위가 끝난 오후 3시30분쯤 위안부 소녀상 오른편 바닥에 커다란 정사각형 모양의 노란색 천 한 장이 놓였다. 소녀상을 찾은 시민들이 한 마디씩 남기는 ‘위안부 롤링페이퍼’였다.

백정미(28)씨 등 3명은 대형 천에 ‘할머니들의 고통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은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머리에서 붉은 봉선화 꽃 한 줄기가 피어 오르는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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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늦은 밤까지 노석농성중인 대학생들을 응원하기 위한 시민 행렬이 이어졌다.


소녀상 옆에서 농성중인 대학생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발길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직장인 박덕한(45)씨는 대학생들에게 초코파이 등 과자 5상자를 건넸다. 한참 동안 소녀상과 학생들을 번갈아보던 박씨는 “뉴스를 보고 처음으로 소녀상을 보러 오게 됐다”며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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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촛불 문화제’에 참석한 대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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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가 되자 대학생 윤준호(25)씨의 사회로 ‘한일협상폐기 촛불문화제’가 시작됐다.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시민과 대학생 100여명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한 대학생은 “경찰이 지난번 문화제에 참석한 대학생들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냈다”며 “여기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신분 노출을 꺼릴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문화제는 시 낭송과 선언문 낭독 등으로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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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노숙농성장에 등장한 전기발전기. 이날부터 학생들은 전기발전기로 전기장판을 틀며 추위를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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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농성중인 대학생들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활용한 전기장판.

문화제가 끝나자 노숙농성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이 전기 발전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국회의원들이 경찰에 협조를 구해 전기 발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자야 하는 건 똑같지만 전기장판 덕분에 몸을 녹일 수 있게 됐다”며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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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건네준 간식을 먹고 있는 대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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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10명의 대학생들은 전날처럼 온몸에 핫팩을 붙이고 침낭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얼굴은 초췌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졌지만 시종일관 웃는 모습이었다. 이들이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 소녀상 주변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일본대사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상의 표정은 결연했지만 외롭지 않아 보였다.

정진우ㆍ공다훈ㆍ백수진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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