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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총수 배임사건, 기업 살리려 회사돈 썼다면 집유

중앙일보 2016.01.05 02:02 종합 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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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수(65) 전 STX 회장과 CJ그룹 이재현 회장은 지난해 10월과 12월 두 달 사이로 서울고등법원 법정에 섰다. 선고 결과가 나온 뒤 두 기업인은 희비가 엇갈렸다. 강 전 회장은 당시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김상준)로부터 징역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년5개월여의 수감생활에서 풀려났다. 1심에선 징역6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CJ그룹 이재현 회장은 파기환송심인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 이원형)로부터 징역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회장은 신장 이식 수술 부작용 등으로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태였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지 못했다. 두 사람은 횡령과 배임 혐의는 공통으로 적용됐다. 강 전 회장은 횡령액 557억원, 배임액 2841억원이었고 이 회장은 횡령액 963억원, 배임액 569억원이었다. 다만 강 전 회장은 2조3000억원대 분식회계, 9000억원대 사기대출 혐의가 무죄가 났고 이 회장은 546억원 조세포탈 등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 점이 달랐다.

횡령·배임죄 최근 판결 경향
징역3년 집유5년 ‘3·5 공식’
태광 이호진 회장 이후 깨져

 대법원이 배임 혐의 일부에 대해 감경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파기환송한 뒤 재판에서 내려진 실형 선고는 CJ그룹에 충격을 던졌다. “조세포탈 혐의만으로도 실형선고가 불가피하다”는 게 재판부가 제시한 이유였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법원 관계자는 “위기에 빠진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둔 경영상 무리수가 문제가 됐던 강 전 회장에 비해 이 회장의 혐의는 이 회장 개인의 이익을 위한 행위로 판단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법무법인 등에선 “대기업 총수 재판이 재판부의 성향에 따라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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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2014년 이후 법정에 선 대기업 총수들은 운명이 엇갈렸다. 이 회장을 비롯해 SK그룹 최태원 회장(징역4년),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징역7년)은 실형을 받았지만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징역3년 집행유예 5년),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징역3년 집행유예 5년) 등에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사익(私益) 실형, 경영상 판단 집행유예’ 경향이 생긴 건 2013년 9월 대법원이 김승연 회장에게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면서부터다. 회사 돈을 빼돌려 위장 계열사에 지원하는 등 회사에 3000억원대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됐던 김 회장은 2012년 8월 1심에서 징역4년에 벌금 51억원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지만 대법원을 거쳐 파기환송심(서울고법 형사5부 김기정 부장)에서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 등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당시 재판부는 “기업주가 회사 자산을 자신의 개인적 치부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한 전형적인 사안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법원의 이런 판결 추세는 2012년부터 두드러졌던 ‘기업인 범죄 엄벌주의’가 균형을 되찾는 과정으로 분석됐다. 대선 10개월 전인 그해 2월 서울 서부지법 형사11부(부장 김종호)가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과 모친인 고(故) 이선애 전 상무에게 각각 징역4년6개월, 징역4년의 실형과 벌금 20억원을 선고한 사건은 엄벌주의의 신호탄이었다.

 당시 선고를 현장에서 지켜봤다는 태광그룹 관계자는 최근 “그 이전까지의 법원 판결 성향과 너무 다른 결과가 당시 나와 그룹 전체가 충격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이 재판 한 달 전 거액의 회사 돈을 빼돌려 사들인 그림을 자택에 거는 등의 수백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오리온 그룹 담철곤 회장이 항소심에서 징역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된 것과 대조를 이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과거 기업관행에서 비롯된 기업 총수들의 배임·횡령 혐의에 ‘3·5 공식’(징역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왔던 관행과도 판이한 것이었다.

 한 법조계 인사는 “당시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무르익었던 반기업 정서가 이 회장 재판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태광그룹 사건’ 이후 김승연 회장(2012년 8월)과 최태원 회장(2013년 1월)에게 1심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 법정구속하면서 재계에선 엄벌 일변도에 대한 우려가 제기돼 왔다.

 최근 학계와 재계에선 기업인의 경영상 판단은 결과적으로 기업에 손해를 발생시켰더라도 면책해 주는 규정을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삼현 숭실대 법대 교수는 “현재 법원 분위기로는 여론의 향배에 따라 재판의 경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며 “독일과 일본처럼 명문으로 경영상 판단에 대한 처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도 “경영상 판단의 결과를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건 기업인의 경영활동을 위축시켜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임장혁·정혁준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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