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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환의 제대로 읽는 재팬] “위안부 재단, 한·일 여러 단체 힘 합쳐 공동운영해야”

중앙일보 2016.01.04 01:32 종합 1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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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져 있는 ‘평화의 소녀상’의 꼭 쥔 주먹 위에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꽃과 장갑이 놓여져 있다. [김성룡 기자]


1995년 6월 14일 일본 총리 관저.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의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廣三·사망)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계획을 발표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우호기금(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으로 개칭)’ 발족과 사업 내역을 담은 것이었다. 사업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국민적 보상 또는 속죄(償い·atonement)를 위해 기금이 민간 모금을 한다. 둘째, 정부 자금으로 피해자에 대한 의료·복지 등 사업을 한다. 셋째, 정부는 국가로서 솔직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넷째, 정부는 위안부 관련 자료를 모아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다가 그것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이 남긴 것
1995년 설립 일본 민·관 합동 기금
피해자에게 총리 사죄 편지 전달
디지털 기념관엔 위안부 자료 남겨
당시 전무이사 지낸 와다 교수
“피해자 방문, 총리 사죄 전할 필요”


 이 계획은 무라야마 사회당 당수가 총리여서 가능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당시는 사회당·자민당·신당 사키가케의 연립정권이었다. 여성기금은 무라야마 총리가 94년 8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면서 국민 참여의 길을 탐구하겠다고 한 담화의 결과물이었다. 위안부 보상이 정부 예산이 아닌 민간 모금액으로 결정난 것은 자민당 우파와 관료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전후 배상과 보상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종결됐다는 입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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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금의 발기인은 16명이었다.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전 총리 부인 무쓰코(睦子) 여사를 비롯한 여성계, 도쿄대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오누마 야스아키(大沼保昭) 교수 등 전후 보상 운동에 관여한 인사,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전 주한국 대사 등 각계 인사가 망라됐다. 인선과 관련해선 오누마 교수 등이 이가라시 관방장관· 내각 외정심의실과 협의를 거듭했다고 한다. 여성기금은 95년 7월 발기인 회의와 이사회를 거쳐 공식 출범했다. 발표 한 달 만이었다. 2007년 해산한 기금의 모금액은 약 6억 엔, 정부 출자·보조금은 약 48억 엔이었다. 기금은 한국·필리핀·대만·네덜란드·인도네시아 5개국 피해자를 상대로 보상 사업을 했다. 한국 피해자들엔 모금액으로 충당하는 보상(속죄)금 1인당 200만 엔과 총리의 사죄 서한 등이 전달됐다. 일본 정부 출자로 1인당 300만 엔 규모의 의료복지 사업도 실시됐다. 기금의 지원을 받은 한국 피해자는 61명으로 파악된다.

 여성기금은 지난달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설립하기로 한 위안부 지원 재단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새 재단은 지원 대상이 한국 피해자에 국한된다. 여성기금이 사실상 일본 민·관(民官)의 공동운영 재단이었다면 새 재단은 한·일 공동 운영에 가깝다.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자하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문은 양국 정부가 협력해서 사업을 하도록 한 만큼 집행을 위해선 상호 협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 여성기금처럼 피해자에게 총리의 사죄 편지를 전달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기금의 전무이사를 지낸 와다 교수는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가 피해자를 방문해 (총리의) 사죄 뜻을 전하는 구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성기금의 설립 과정과 활동은 여러 시사점도 준다. 먼저 새 재단 설립 추진위원회의 구성 문제다. 여성기금은 전후 보상 문제나 여성 인권 문제에서 활동한 지도급 인사들이 발기인이 됐다. 초대 이사장은 하라 분베(原文兵衛) 전 참의원 의장이었다. 하라는 1987년 이래 이가라시 관방장관과 더불어 사할린 잔류 조선인의 한국 영구 귀국 등 해결에 앞장섰다. 2대이자 마지막 이사장은 무라야마 전 총리였다. 그런 만큼 새 재단에도 관련 분야의 상징적인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교수는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해온 한·일 여러 운동단체의 힘도 빌려 한·일이 함께 재단을 운영해 나가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성기금은 발기인과 일본 정부 주도로 뽑은 기금 이사들 간 의견차로 삐걱거리기도 했다. 발기인들이 이사가 돼 의사결정을 주도하기 시작한 99년까지 그랬다고 한다(『‘위안부’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오누마 야스아키). 재단 추진위원과 의사 결정을 하는 이사들이 서로 달라 마찰을 빚으면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여성기금은 디지털 기념관(www.awf.or.jp)을 남겼다. 한국어·일어·영어로 여성기금 설립 과정과 사업, 위안부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여성기금은 정부와 시민이 함께 운영한 사례이기도 했다. 와다 교수는 "여성기금은 정부와 국민, 정부와 시민운동이 함께 한 전례가 없는 형태”라며 “주제도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었던 만큼 이 경험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글=오영환 도쿄총국장 hwasan@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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