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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야기’ (1992)

중앙선데이 2016.01.03 00:36 460호 24면 지면보기

5 영화 포스터 [사진 마티]

[영화 속에서]?어리석더라도 환상일지라도…?‘봄’을 불러 오는 것은 결국 믿음



 

2 도서관 사서 루이와 펠리시.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끝-

에릭 로메르의 사계절 연작 중 하나인 ‘겨울 이야기’는 펠리시라는 여인의 고집 센 믿음을 보여준다. 5년 전 샤를르라는 남자와 뜨거운 여름을 보냈던 펠리시는 주소를 잘못 적어주는 실수로 파리에서 미혼모로 살아간다.



주변에는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는 남자들이 있다. 펠리시가 일하는 미용실 사장 맥상스는 이혼을 하면서 고향 느베르 행을 결정한다. 그는 새로운 미용실을 열고 펠리시와 함께할 보금자리를 제안한다. 루이는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인텔리다. 펠리시는 종종 그의 집에 기거한다.



하지만 느베르에서도, 루이의 이층방에서도 펠리시는 정착하지 않는다. 12월 15일에 시작해 12월 31일에 마무리되는 펠리시의 ‘겨울 이야기’는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여자의 묘한 태도와 5년 전에 만났던 샤를르를 향한 집착과 믿음을 다루고 있다. 놀라운 것은 딸 앨리스와 함께 올라탄 버스에서 샤를르와 재회하는 장면이다. 기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순간은 펠리시의 고집스러운 믿음이 기회를 얻는 열림의 순간이다.



 

1 샤를르와 기적적으로 재회한 펠리시와 딸 앨리스.



“믿는 쪽에 인생 걸어야 삶이 풍요”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펠리시와 함께 본 루이는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향해 파스칼의 ‘내기 이론’을 설명한다. ‘팡세’의 저자로 잘 알려진 파스칼은 신을 향한 믿음을 두고, 믿음에 내기를 걸라는 이론을 펼쳤다. 만약에 신이 있다고 믿는 쪽을 택한다면 천국이라는 행복한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없다 하더라도 약간의 시간을 허비하는 손해에 그칠 것이다. 반면, 신이 없다는 쪽에 걸었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지옥’에 떨어지는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테고, 없다 하더라도 아무 득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신이 있다고 믿는 쪽에 걸어야 유리하다는 것이 수학자 파스칼의 지론이다.



이 논리는 종교뿐만 아니라 많은 상황에 적용된다. 루이는 펠리시에게 “믿는 쪽에 거는 것이 기다림의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며 그녀를 다독인다.



반대파도 있다. 펠리시의 친구들은 샤를르를 완벽한 남자라고 여기는 환상과 그를 만날 거라는 믿음에 혀를 내두른다. 그럴만하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어리석음에 종종 혀를 내두르게 되지 않는가. 성숙한 믿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균형 감각이 필수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이 그녀의 기다림을 풍성하게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맥상스의 안락한 삶이나 루이의 친절한 삶에 금방 익숙해지고 의지할 수 있었다. 인생 경험이 풍부하지도 지적이지도 않지만 두 남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 덕분이다. 믿음은 한 인간의 삶을 지탱해낸다. 환상이자 자기 기만적 요소가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은 하나의 신념이 되어 굳건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어준다.



 

3 헤어숍을 운영하는 맥상스와 펠리시.



기적이 사라진 건 믿음이 사라진 탓이것이야말로 현대사회가 상실해버린 가치다. 타인을 향한 신뢰보다는 불신의 눈길로 바라보기 쉽고, 그 가운데 믿음의 가치를 돈이나 권력에 두고 쌓기를 갈망한다. 펠리시의 가치는 인간을 향한 애정의 믿음이지 돈이나 권력에 의지하는 믿음이 결코 아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이 이상하기에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세태가 아니라 믿음의 가치를 포기해버렸다는 것에 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의 결론은, 대를 이어서라도 산을 옮기겠다는 우공의 말을 듣고 놀란 산의 신령들이 하늘의 신에게 부탁하여 산을 옮기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우공의 말에는 강렬한 믿음과 함께 믿음의 시간을 유지하면서(대를 이어서) 믿음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다. 그것은 기적을 가져온다.



오늘날 기적이 사라진 것은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에릭 로메르가 셰익스피어의 동명 제목을 빌어 일상의 기적을 보여주는 것은, 메마른 겨울의 기다림을 지나는 인생이 봄처럼 피어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펼쳐지는 겨울이 지나길 기다려야 한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기적을 ‘믿는다’고 말하지만?어리석게 매달리는 건 아닐까



 

펠리시는 여름 바캉스 중 만난 샤를르와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 휴가가 끝나고 파리로 돌아오며 그녀는 샤를르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가르쳐준다. 하지만 그에게선 아무 소식이 없고 나중에야 펠리시는 자신이 잘못된 주소를 가르쳐준 것을 깨닫는다. 이후 펠리시는 샤를리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미용사로 일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샤를르를 완전히 잊지 못한 채 루이와 맥상스 사이에서 갈등한다.



‘겨울 이야기’에는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남자의 위상학, 남자의 유형론이 전개된다. 여주인공이 만난 순서대로 남자의 유형을 정리해보자. 먼저 5년 전 바캉스를 함께 보내며 열정을 불태웠던 요리사,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듯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웠던 ‘낭만적인 남자’다. 낭만적인 남자와 헤어진 뒤, 그녀는 도서관 사서를 만난다. 도서관이 상징하는 것처럼 그는 철학·종교·예술 등에 대해 논하는 것을 즐기는 매우 ‘지적인 남자’였다. 마지막으로 헤어숍을 운영하는 미용사. 숍을 차릴 정도로 사업수완이 있었던 ‘경제적인 남자’였다. 낭만적인 남자, 지적인 남자, 그리고 경제적인 남자. 당신이라면 이 셋 중 누구를 택할 것인가.



 



사랑의 기적을 굳게 믿는 여자그녀에게는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해 사랑을 나누며 바캉스를 함께했던 요리사, 즉 ‘낭만적인 남자’가 최고의 사랑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그와 헤어졌을까. 이유가 조금 황당하다. 바캉스가 끝나 잠시 헤어져야 할 때 그녀가 남자에게 잘못된 집 주소를 가르쳐준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측면도 있었다. 의도치 않은 실수로 헤어졌으니, 가장 좋았던 기억만 간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불행한 일이기도 했다. 요리사와 정말 끝장을 보고 헤어졌다면, 그녀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녀 옆에 있는 미용사와 사서도 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한들 그녀는 과거에 쏠려 있을 뿐이니까. 낭만적인 남자를 잃어버린 다음, 그녀는 지적인 남자를 버리고 경제적인 남자를 택한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이 남자에게도 이별을 고한다.



누구와 함께 살겠다는 선택도, 그리고 누구와는 함께 못살겠다는 결단도 모두 낭만적인 사랑의 경험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의 절대적 잣대, 즉 낭만적 사랑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루만(Niklas Luhmann)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에 실린 한 구절이 떠오른다. “스스로를 내어줌으로써 스스로를 보존하고 고양시키는 것!” 낭만적 사랑은 일체의 외적인 강압 없이 완전히 자유롭게, 그리고 완전히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의 경험이다. ‘겨울 이야기’ 속 여주인공의 낭만적 사랑은 자발적 복종과 그 메커니즘이 동일하다. 자발성이 주인의 덕목이고 복종은 노예의 덕목이니, 자발적 복종과 유사한 낭만적 사랑에는 묘한 역설과 팽팽한 긴장이 도사린다.



비유를 들자면, 낭만적 사랑을 날카로운 능선에, 자발성과 복종을 그 능선의 양편에 펼쳐진 낭떠러지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사랑은, 상대를 지배하려 할 때도 상대의 지배를 받으려고 할 때도 불가능한 법이다. 사랑이란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 경험인가. 눈을 뜨고는 건너기 힘든 위태로운 능선을 안대를 한 채 건너는 기적, 바로 이것이 낭만적 사랑의 경험이다. “제 스스로 당신의 노예가 되어버렸어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겨울 이야기’는 겨울에 끝나야 할 운명에 사로잡힌 이야기다. 그래서 로메르 감독은 두 남자를 버린 그녀에게 낭만적인 남자를 갑작스레 되돌려준다. 신년 가족 모임에 참석하러 딸과 함께 가던 중 버스 안에서 그 요리사와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되는 것이다.

4 주소를 잘못 알려줘 샤를르와 안타깝게 헤어지는 순간.

에릭 로메르 감독



낭만적 사랑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까5년 전 경험했던 낭만적 사랑을 그녀는 다시 복원할 수 있을까. 감독은 묘한 낙관론을 피력하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피가 끓는 젊은 시절에만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낭만적 사랑은 ‘비자발적 사랑’인 셈이다.



불행히도 이제 그도 그녀도 세상 풍파에 마모되어 몸보다는 머리를, 감정보다는 지성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니 낭만적 사랑은 두 사람에게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에덴동산일 뿐이다.



물론 한 가지 길이 남아 있기는 하다. 낭만적 사랑이 아니라, 낭만적이려고 분투하는 자발적인 사랑의 길! “제 스스로 당신의 노예가 되려고 해요! 이것은 저의 의지예요.” 그러나 의지로 지탱하는 자발적 사랑이란 추억을 반복하려는 헛된 노력에 불과하지 않을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비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사랑이란 대체 어떤 가치를 지닐까.



 



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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