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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철학과 일본 전통의 융합… ‘관념의 혁명’ 불붙인 신포석

중앙선데이 2016.01.03 00:33 460호 26면 지면보기

지고구타니 계곡 앞에서의 우칭위안 (앉은 사람)과 기타니 미노루. [사진 일본기원]

기보 A가 아닌 흑27, B가 아닌 흑29가 신포석의 아이디어에 힘입은 착상이다.



1933년 여름 우칭위안(吳淸源)과 기타니 미노루(木谷實)는 백26을 둔 상태에서 대국을 중단했다.<기보 참조> 신주쿠(信州)의 지고구타니 계곡(地獄谷)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는 기타니의 처가가 운영하는 여관 고라쿠칸(後樂館)이 있다. 밤이면 검은 반공(半空)을 머리에 이는 산 중턱에 야외 온천을 갖춘 곳이다.


[반상(盤上)의 향기] 新포석이 만든 새로운 세상

좋은 시절이었다. 기타니 25세에 우칭위안 20세. 두다가 내키면 중단도 가능했다. 물론 제한 시간이 넉넉할 때의 이야기다. 물 같은 풍광이 몸을 씻어주고 건조한 공기에 실려오는 유황 냄새가 정신을 맑게 했다. 여관 2층 네댓 평 방에서 두 기사가 정석과 포석의 통합을 논의했다. 정석은 두어야 할 수순을 밝힌 것. 부분적으로 권위가 깃들어 있다. 그것을 개념부터 무너뜨렸다.



석 달 만에 돌아와 재개한 바둑을 보자. 하변 흑27과 좌상귀 흑29가 새로운 발상으로, 이 바둑이 두 개의 다른 세계를 혼합했음을 말해준다. 대국의 첫수는 3三으로 우칭위안은 그것을 기초로 바둑을 짰다. 속도 관념의 시도였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세력의 이해에 기반해 고원(高原)을 지향했다. 우칭위안은 회고했다. “여행이 없었다면 흑27은 A에 깊이 침입했을 것이다.” 그랬다. 흑29도 B에 걸쳤을 것이다.



신(新)포석 혁명이었다. 일본 바둑 300년의 부정이었고 다가올 100년의 초석이었다. 다음 해엔 책도 냈다. 『신포석법』. 바둑 역사상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이다. 오늘날 그 책을 읽는 자는 아무도 없지만 그 책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 또한 하나도 없다.



 우칭위안·기타니 시각으로 보는 바둑8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바둑이 있었다.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9단의 ‘우주류’다. 많은 애기가들이 우주류를 그의 독창적인 바둑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우주류는 신포석법이 제시한 세력 관념을 충실히 구현한 것이다. 그 뛰어난 조훈현의 발 빠른 행마도 그렇다. 그것은 우칭위안의 속도 관념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1 1960년 제3기 일본 최강자전 리그에서 만난 우칭위안(왼쪽)과 기타니 미노루(오른쪽)가 대국 후 복기를 하고 있다.



조화(調和)와 속도 개념이 얻기 쉬운 걸까. 3三을 처음 두거나 4선 중심의 착상을 처음 하고 또 실천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일까. 그 모두가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진부한 말이지만 우리는 우칭위안과 기타니의 어깨 위에서 바둑을 바라보는 게 사실이다.



세상의 이해엔 역사적 안목이 중요하다. 바둑도 그렇다. 1930년대 신포석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17세기에 일본 바둑이 도사쿠의 패러다임 혁명을 겪어 새로운 체계를 잡기 시작했고, 19세기 중엽 그 체계가 정점에 오르고 나서 곧 몰락을 맞이했으며, 20세기 초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 기타니(바둑판 왼쪽)와 우칭위안이 바둑을 검토하고 있다. 가운데 앉은 이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진 일본기원]



1826년 혼인보(本因坊) 조와(丈和) 명인이 책을 한 권 펴냈다. 『국기관광(國技觀光)』. 국기(國技). 바둑을 국기로 불러도 된다고, 중국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불과 30년 후 막부가 무너져 어성기가 폐지되었다. 기사들은 궁핍해갔다. 바둑의 4대 종가 중 혼인보 가문만이 살아남았다. 혼인보 슈에이(秀榮)는 교습용 바둑판을 식탁으로도 사용했다. 생활이 어려울진대 바둑의 내용이라고 다를까. 그런 그런 내용의 바둑이 그리 그리 흘러갔다. 격변하는 세상에서 바둑은 뒷전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시장이 일본 경제를 지배하고 신문이 바둑을 싣기 시작했다. 일본이 중국 대륙으로 지도를 확장했다. 바둑에 새로운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1924년 일본기원이 창립되고 젊은 세대가 바둑에 인생을 걸었다.



반상으로 잠시 눈을 돌리면, 반상 이해에 요긴한 명제가 하나 있다. “반상은 모호한 곳을 향해서 뛰어왔다.”



비슷한 실력은 비슷한 지식을 전제한다. 그 때문에 기사들의 실력이 비슷해지면 모두들 더 나은 지식을 얻으려 한다. 그래야 이긴다. 더 나은 지식이란 무엇인가. 모호한 세상을 더 잘 다루는 방식이다. 막부시대에는 각 가문이 비전(秘傳)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세계는 사라졌다. 20세기 초 자본주의 시장에서 책이 널리 확산될 때 그런 비전(秘典)을 홀로 전유할 수 있는 가문은 없었다. 모든 권한과 책임은 기사 개인에게 떨어졌다. 20세기 초 모두들 조와가 도달한 수준을 잘 알고 있었다. 모호한 곳을 다시 새롭게 찾을 때가 된 것이다.



철학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기초적인 해결을 완수하는 작업. 하지만 철학은 새로운 문화를 만나야 일어선다. 20세기 초 중국과 일본은 바둑 역사 3000년 사상 처음으로 대면했다. 그 전에는 문헌으로나 만날 수 있었다. 문화의 충돌은 생명의 충돌처럼 세상의 맹아다.



문화와 철학이 반상에 영향을 끼칠 시간이 왔다. 1928년에 일본에 온 우칭위안이 새로운 실험을 감행했다. 이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노장(老莊) 철학에 깊이 경도되었던 우칭위안은 33년 슈사이(秀哉) 명인과의 환갑 기념 대국에서 3三을 시도했다. 전대미문이었다. 3三 한 수로 귀를 점거하고 발 빠르게 요처를 찾는다는 발상이었는데, 그것은 전체성의 안목, 곧 노장 철학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3三은 전체의 안목에서 선택된 착점이었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반상을 추상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세력의 한계 짚어내고 혁신한 기타니바둑이란 어떤 것인가. 몸이 작용하는 세계다. 예를 들자. 수직선을 중심으로 반상을 인식하는 것은 힘들다. 중력의 작용 때문인데 눈으로 마천루를 쳐다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들이 도시의 소외를 노래한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수직선을 바라보는데 힘이 들지 않았다면 도시의 소외를 그리 쉽게 노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둑에서 세력의 실험은 쉽지 않았다. 수직선 중심으로 바둑을 바라보는 세력이 19세기 중반 일본 바둑 300년의 막바지에서야 비로소 고개를 내민 이유다. 세력은 수직선이 핵심이며 집 바둑은 수평선 중심이었다. 17세기의 기성 도사쿠(道策)도 수직선에서는 한계를 겪었다.



천재는 혁신의 시대에 등장한다. 기타니가 등장했다. 그는 세력을 철저히 연구했다. 한계를 짚어내고 혁신을 찾았다. 기보에서 백의 수법이 바로 그것으로 신포석의 골자 중 하나였다. 개념을 갖고 노는 방식도 빠뜨릴 수 없다. 의식의 힘을 붙잡아 매는, 그래서 의식을 부릴 수 있는 도구가 개념이다. 신포석은 개념을 활용해 연역적으로 바둑을 탐구했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혔다.



① 바둑은 집이 많아야 이기는 놀이다. 집의 다과(多寡)는 돌의 효율에 달린 문제인데 돌의 발전성이 높은 수가 효율이 높은 수다.



② 3선의 돌은 집을 잘 만들지만 4선과 비교해 볼 때 발전성은 부족하다.



③ 4선의 발전성을 3선이 주는 고정적 집의 가치와 비교하자. 4선 이상의 선에서 효율이 높은 포석법을 구하도록 하자. 그 방식을 신포석법이라고 이름 붙이자.



이상이 신포석법의 연역적 접근이었고 그것에서 나온 것이 세력과 속도였다.



 망해가던 출판사도 살린 신포석의 힘인물의 매력도 이론에 더했다. 야스나가 하지메(安永一)가 뒤에 합류했는데 그의 개성과 필력, 논리가 더해져 3인 공저 『신포석법』이 완성되었다. 야스나가는 『기도(棋道)』 편집장을 지낸 인물로 한때는 프로기사로도 활동했다. 『중국의 바둑(中國の碁)』 등을 펴낸 일본 바둑 제1의 이론가였다. 『신포석법』은 순식간에 5만부가 팔려나가 부도 위기에 처한 출판사 헤이본샤(平凡社)를 회생시켰다. 아마추어들은 너도나도 신포석을 시도했고 신구(新舊) 세력의 경쟁에 환호했다.



인기와 실험이 어느 정도 폭발적이었던가. 1933년 가을과 34년 봄, 그 짧은 시간에 등장한 신포석의 영향을 하나 보자<표 참조>. 구(舊)포석이 반(半)을 넘지만 신포석의 영향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1936년엔 간행된 바둑책의 반 정도가 신포석과 관련되었다. 『포석과 정석의 통합』 『실전 신포석』 『신포석의 침로(針路)』 『최근의 신포석』 등등. 『타도 신포석(打倒新布石)』이란 책도 있었다. 신포석의 폭발은 일본 바둑이 크게 흥왕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바둑은 놀이. 하지만 이끄는 건 철학이다. 신포석 이후는 더욱 그러하다. 간략하게 말하면 1930~80년 다양한 포석을 실험한 일본 바둑은 신포석이라는 철학의 해석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2연성, 3연성 등의 포석 외에도 다케미야의 우주류, 다카가와 가쿠(高川格)의 모자(帽子),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의 3三 등은 신포석에서 영감받은 기사 독특의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철학에 영감을 받았고 일본의 전통에 기초를 둔 신포석은 국적이 필요 없는 관념의 혁명이었다. 오늘날 바둑 두는 우리의 사고의 중심에는 신포석법이 펼친 세계가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다. 인식의 밑바닥에 놓인 세계는 보통 사람들 손에는 잘 잡히지 않는 법. 신포석은 이제 그런 것이 되었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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