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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옹지마’ 류원후이… 조카와 전쟁 패배 뒤 승승장구

중앙선데이 2016.01.03 00:24 460호 29면 지면보기

시캉성 주석 시절, 개간위원회 주임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비행장 활주로 건설 현장을 시찰하는 류원후이(오른쪽에서 둘째). [사진 김명호]



1931년 여름, 숙질(淑侄)간인 류원후이(劉文輝·유문휘)와 류샹(劉湘·유상)의 충돌은 극에 치달았다. 류원차이(劉文彩·유문채)는 동생 류원후이를 지원하기 위해 자객을 고용했다. 충칭(重慶)에 잠입한 자객은 류샹을 찾아가 이실직고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9-

류샹은 보복에 나섰다. 비행기로 류원차이의 근거지 이빈(宜賓)을 포격했다. 기겁한 류원차이는 그간 모아놓은 은 20만 냥과 금은보화를 큰 나무상자 4500개에 쓸어 담았다. 고향 안런(安仁)까지 선박 20척을 동원했다. 안런에 안착한 류원차이는 주변 7개 현(縣)의 땅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금융업에도 눈을 돌렸다. 은행 22개와 전당포 5개를 직접 운영했다.



류원후이와 류샹의 전쟁은 2년을 끌었다. 1933년 9월 중순, 패배를 선언한 류원후이는 병력 10만을 이끌고 시캉(西康)으로 철수했다. 시캉은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류원후이는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민족의 단결을 주장했다. 한동안 쓰촨성 주석을 역임했던 탓이지 효과가 있었다. 티베트 지도층의 지지를 등에 엎고 ‘시캉성(省) 건성(建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난징의 국민정부는 쓰촨에 기반이 약했다. 군을 파견할 명분을 만들었다. 추적 중이던 홍군 주력을 쓰촨 쪽으로 몰아 부치고 류원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 명의로 ‘국민정부 시캉성 건성위원회 위원장’과 ‘국민당 시캉성 지부 주비위원회 주임’ 임명장을 류원후이에게 보냈다.



1937년 여름, 항일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쓰촨 장악에 나섰다. 류원후이를 군단장에 임명했다. 쓰촨의 지배자 류샹이 우한(武漢)에서 세상을 떠나자 측근을 후임으로 내보냈다. 속셈을 파악한 류원후이는 류샹의 부하들과 연합해 장제스를 압박했다. “신임 주석을 거부한다. 장제스가 쓰촨성 주석을 겸하고 대리를 파견한다면, 그건 받아들이겠다.”



당황한 장제스는 류원후이에게 전문을 보냈다. “만나서 얘기하자.” 류원후이가 오자 속내를 털어놨다. “예로부터 쓰촨은 천혜의 요지였다. 일본과 전쟁을 치르기에 난징은 수도로 적합하지 않다. 충칭으로 천도할 생각이다. 쓰촨의 일부를 시캉에 귀속시키겠다. 시캉성 정부가 수립되면 국민정부와 쓰촨성 정부가 건설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겠다.” 류원후이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1 쓰촨에 진입한 국민당 중앙군. 1938년 8월, 장소 미상.



1938년 11월 20일, 우한에서 열린 국민정부 행정원 국무회의는 ‘시캉성 건성안’을 통과시켰다. 초대 주석에 류원후이를 임명했다. 지금의 쓰촨성 동부와 장족(藏族)자치구 동부를 장악한 류원후이를 사람들은 ‘시난왕(西南王)’이라고 불렀다.



장제스는 류원후이가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성 중심도시 시창(西昌)에 군사위원회 위원장 연락사무소를 설치해 류원후이를 감시했다. 류원후이는 시캉성 개간위원회를 설립해 장제스에게 맞섰다.



 

2 시캉에 설치한 무전 송신소. 1939년 11월, 야안(雅安). [사진 김명호]



중공도 류원후이에게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식인들로 구성된 밀사를 꾸준히 파견했다. 류원후이는 이들에게 호감이 갔다.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과 연락 주고 받으라며 무전시설까지 갖춰줬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도 여러 차례 통화하며 가까워졌다.



류원후이가 시캉에 군림하는 동안, 류원차이의 사업은 번성 정도가 아니었다. 소금·약재·면직물의 가격을 농단(壟斷)하고 아편을 독점했다. 재물이 산처럼 쌓이자 공익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류원차이는 일반 악덕 지주나 아편상인과 달랐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기고 지식을 존중하던 습관이 평생 변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자 청소년 교육에 흥미를 느꼈다.



중학교 설립을 결심한 류원차이는 현재의 베이징대학 반을 능가하는 부지에 당시 돈 미화 2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4년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쉬지 않고 건설 현장을 살폈다. 벽돌 한장도 최 일류가 아니면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교사도 우수한 사람만 채용했다. 봉급은 일반 학교의 두 배를 줬다. 첫 번째 입학생들에게는 학비를 받지 않았다. 2회 입학생부터는 쌀 여섯 되를 받았지만, 못 내도 그만이었다. 교명은 자신의 이름을 땄다.



개교 첫날 류원차이는 성명을 냈다. “오늘부터 원차이중학(文彩中學)의 모든 재산은 설립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내 자손들은 학교에 어떤 권리도 주장할 자격이 없다.” 류원차이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개교 이후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학교 운영에는 간섭을 안 했다.



류원차이의 비호를 받는 원차이 중학은 난세의 도원경이었다. 여학생 한 명이 지방 관리의 마름에게 조롱당한 적이 있었다. 보고를 받은 류원차이는 분노했다. 마름을 잡아다가 반 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서 거리에 내던졌다. 이튿날 전교생에게 지시했다. “교복이 너희들의 호신부다. 밖에 나갈 때 꼭 착용해라. 집에도 우리 학교 학생이 산다고 써 붙여라.”



류원차이는 중공정권 수립 직후 폐병으로 사망했다. 전교생이 유해 앞에 무릎 꿇고 통곡했다. 장제스와 불화가 심했던 류원후이는 중공에 투항했다. 수천만 명이 붐볐던 수조원을 저우언라이는 관람하지 않았다. 시캉성은 1957년까지 존속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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