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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 빈 사우디, 중동 맹주 자리 흔들

중앙일보 2015.12.30 00:55 경제 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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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저주에 시달리고 있다. 사우디 내각회의는 28일(현지시간) “왕국 내 휘발유 가격을 최대 67% 올린다”고 발표했다. 보통 휘발유 값이 리터당 0.45리알(139원)에서 0.75리알(233원)으로 올랐다. 등유와 경유 등 다른 기름값도 올릴 방침이다. 심지어 “전기와 수도 요금도 올릴 수 있다”고 발표했다.

유가 하락에 기름 캘수록 빚 쌓여
올 재정적자 1000억 달러 예상
이란과 패권경쟁 벌일 실탄 부족
자구책으로 휘발유값 67% 인상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전문가의 말을 빌려 “사우디 왕실이 원가보다 낮은 기름값을 적용해왔으나 국제 유가 추락과 군사비 지출 급증으로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사우디가 보조금을 삭감했다”라고 설명했다.

 사우디는 올해 1000억 달러(약 117조원) 정도 적자를 낼 듯하다. 국내총생산(GDP)의 13% 수준이다. 내년 재정적자는 870억 달러(11.3%)가 될 전망이다. 그리스의 재정 상태가 가장 나빴던 2009년 적자 비율이 15% 수준이었다. 지난해 그리스 재정적자는 3.6%였다.

 사우디가 2014년 수준의 정부지출을 감당하기 위해선 국제유가가 배럴당 93달러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29일 두바이산 원유 가격은 배럴당 32달러 선이었다. 사우디가 원유를 캐내 팔수록 재정적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긴축이 불가피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우디의 이날 내놓은 긴축방안으로 재정적자가 눈에 띄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 톰슨로이터는 “왕실이 민주화 요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복지 혜택과 인프라 투자를 많이 늘려왔다”고 전했다. 알 사우드 국왕은 이날 각료회의에서 “사회복지 지출과 인프라 투자를 계속 중시하겠다”고 말했다. 민심 이반을 우려해 복지 지출은 손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사우디 재정적자는 자국 내 문제만이 아닐 수도 있다. 사우디가 걸프지역에서 누리고 있는 위상도 흔들릴 수 있다. 사우디는 이란과 패권경쟁을 벌이며 예멘에서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다. 이웃 바레인 등 상대적으로 가난한 왕실의 재정난을 덜어주고 민주화 시위 전파를 막기 위해 수백억 달러를 제공했다. 이런 식으로 사우디가 쓴 돈이 1000억 달러를 넘는다.

 반면 이란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원유 수출에 나선다. 이는 미국과 핵협상에서 얻은 전리품이다. 지금껏 원유 수출이 수월하지 않아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적자가 상당히 줄어들 전망이다. 블룸버그는 “이란은 제재가 풀리면 1주일 내에 하루 50만 배럴을, 6개월 내엔 하루 100만 배럴을 수출하기 위해 원유 채굴 설비를 서둘러 정비하고 있다”고 29일 전했다. 중동의 맹주 자리를 놓고 사우디와 이란의 패권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조짐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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