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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두 여자 이야기

중앙일보 2015.12.29 00:53 종합 3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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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저출산, 오만 가지 문제 얽힌 대한민국 일그러진 초상
넘쳐나는 골드미스·난임 여성들도 ‘애국’할 길 열리길

밤샘토론 앵커

#“너도 이제 계란 한 판을 꽉 채우는구나.” 이 얘길 듣던 5년 전만 해도 여유만만했다.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은 줄 알았다. 며칠 뒤면 내 나이 서른다섯. 드문드문하던 소개팅 제안조차 끊겨버린 지 오래다. 사윗감에 이런 저런 조건을 달던 부모님은 남자라면 외계인을 데려와도 허락하실 태세다.

 송년회를 빙자해 허한 가슴을 연일 음주로 달래던 즈음, 모 선배가 기어이 내 속을 발칵 뒤집어놨다. “얘, 내가 ○○ 결혼정보업체 대표랑 밥 먹으며 들었는데 네 또래 여자는 애 딸린 돌싱남도 거들떠보지 않는대. 20대 처녀들까지 줄을 섰다던데 뭘.” 그러곤 짐짓 덧붙인 한마디. “혹시 대머리는 관심 없니? 그 대표 말이 머리만 심으면 감쪽같은데도 여자 회원들이 고개를 젓는다나. 더 늦기 전에 공략해봐. 미적대다 그마저 놓칠라.”

 ‘아 놔! 됐거든. 그렇게 헐값에 팔아 치우려고 여태 버틴 거 아니거든.’ 치미는 욕지기를 억누르며 애써 쿨한 척 맘에도 없는 소릴 내뱉고 말았다. 육아와 회사일 병행하느라 가랑이 찢어지는 선배 모습 볼 때마다 결혼 생각이 뚝 떨어진다고, 난 애국자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우아하게 혼자 살란다고. 여우 같은 선배가 과연 내 ‘발연기’에 속아 넘어갔을까. 그나저나 인조 모발 이식할 재력만 갖췄다면 솔직히 대머리도 영 아닌 건 아니지 않나. 그런데 도대체 어딜 가야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거냐고, 나 참.(출산은 둘째치고 시집부터 좀 가고 싶은 34세 골드미스 A)

 #이번에도 또 꽝이란다. 벌써 세 번째다. 무려 여덟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는 ‘7전8기’님,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만에 뜻을 이뤘다는 ‘인간승리’님… 난임(難妊) 카페에서 알게 된 선배 엄마들의 격려가 힘이 되긴 하지만 자꾸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배엔 과배란 주사를, 엉덩이엔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야 하는 불편쯤은 별것 아니라 치자. 남자 의사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난자를 채취할 때 겪는, 형언하기 힘든 수치심과 고통도 참을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올 때 느끼는 허탈감은, 언제가 될지 모를 임신에 대한 기약 없는 기다림은 사람을 많이 지치게 한다.

 정신뿐 아니라 몸도 만신창이 상태다. 과배란 주사란 게 몇 년치 배란을 한꺼번에 시키다 보니 호르몬이 교란돼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다. 거기다 수정란을 자궁에 이식시킨 뒤 착상에 실패하는 건 사실상 유산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나는 2년여에 걸쳐 유산을 세 번이나 한 셈인데 매번 몸도 추스르지 못한 채 멀쩡한 척 회사를 다녀야 했다. 원래 수정란을 이식한 뒤 2~3일간도 착상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극도의 안정을 취해야 한단다. 그런데도 난임이니 불임이니 하는 소릴 듣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출근을 강행했다가 또다시 유산을 하고 만 거다.

 ‘자궁의 신’이라 불리는 주치의는 볼 때마다 혀를 찬다. “빨리 정신 차려요. 회사 그만두지 않으면 절대 성공 못해요. 나이나 적어야지, 원.” 하긴 그 병원에서 난임 시술 받는 이들 중엔 30대 초반도 수두룩하다. 뭐가 잘못된 건지 옛날 같으면 순풍순풍 임신하고 출산했을 여자들이 죄다 개고생을 하고 있다. 의사 말마따나 정말 회사를 관둬야 하나. 하지만 일까지 포기하고 매달렸는데 결국 임신도 안 되면 내 인생은 어찌 되는 걸까.(임신과 직장, 둘 다 포기하기 싫은 39세 난임 여성 B)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두고 말들이 많다. 취업이 안 돼 미래가 불안한 청춘 탓이라거나, 대학 입시보다 더 힘든 ‘유치원 로또’ 때문이라고들 한다. 다 맞는 얘기다. 지금의 저출산은 우리 사회의 오만 가지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불러온 거다. 그러니 그 오만 가지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집집마다 두 명, 세 명씩 아이 낳는 나라를 만들긴 힘든 게 현실이다.

 여자 A나 여자 B 역시 결혼과 출산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들 나름의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 부디 새해엔 A 앞에 배우 숀 코너리 같은 멋진 남자가 나타나길, 또 B를 위해 모든 일터에서 눈치 안 보고 난임 휴직을 쓸 수 있는 멋진 나라가 되기를!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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