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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당신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중앙일보 2015.12.29 00:42 종합 3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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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뉴디지털실장

 복고가 유행이라 그런가, 철 지난 농담 하나를 최근에야 듣게 됐다. 이름하여 이 시대의 4저(져)남 이야기. 요즘 젊은 여자들 눈에 키 작은 남자는 ‘루저’, 못생겼으면 ‘후져’, 돈 없으면 ‘꺼져’. 그리고 이 셋 모두에 해당하면 ‘뒤져’라나. 실제로 여자들이 이런 농담을 얼마나 즐겨 하는지, 또 얼마나 동의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주변의 남자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대체로 이 4저남 얘기에 진심으로 언짢아했다. 키 크고 잘생겼는데 돈까지 많은 남자란 얼마나 드문 존재인가. 웬만한 남자라면 ‘루저’ ‘후져’ ‘꺼져’이거나 때론 ‘뒤져’일 수밖에 없으니 다들 내 얘기인가 싶어 그런 것일까.

 뭐,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웃자고 만든 농담에 죽자고 정색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이 농담에 더 불쾌해하는지 갸우뚱하다 좀 엉뚱한 생각에 다다랐다. 혹시 “세상의 중심인 나를 키 좀 작다고, 얼굴 좀 못생겼다고, 돈 좀 없다고 감히 조롱하다니”라는 자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가뜩이나 키 작고 못생기고 돈 없는 게 싫은데, 남들이 마치 그것만 주목해 바라보는 듯해서 견디기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다.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일명 스포트라이트 효과다.

 마치 스포트라이트가 나만 비추듯, 내가 나에 대해 불편하고 거슬리는 걸 다른 사람도 똑같이 바라보고 신경 쓸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의외로 다른 사람은 나의 약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쓸데없이 감정을 소모한다. 그 지나친 자의식이 때론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세상을 일찍 등진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1962~2008)는 10년 전 한 대학의 졸업식 축사에서 “내가 이 우주의 절대적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뇌에 디폴트로 세팅돼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드러내놓고 말을 안 할 뿐 모두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금만 덜 오만해지자”고 제안한다. 나만이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믿음과 내가 확신하는 것들이 틀릴 수 있다는 자각을 하자는 것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버리는 것, 다시 말해 스포트라이트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면 삶이 보다 여유로워진다.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 알면서도 늘 잊고 사는 이 말을 새해에는 좀 더 명심하며 살아야겠다. 그러면 화날 일도 적을 테니.

안혜리 뉴디지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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