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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스페인을 보며 한국을 생각한다

중앙일보 2015.12.29 00:42 종합 3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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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선거는 끝났지만 누구도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 열흘째 이어지고 있다. 유럽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른 스페인 얘기다. 지난 20일 실시된 총선에서 스페인 유권자들은 어느 정당에도 과반수 의석을 몰아주지 않았다.

 집권당인 국민당(중도우파)이 350석의 의석 중 123석을 차지, 제1당의 지위는 지켰지만 과반수인 176석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4년 전 총선 때와 비교하면 63석을 잃었다. 국민당의 라이벌인 사회당(중도좌파)도 마찬가지다. 110석이었던 의석이 두 자릿수인 90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양당 체제의 두 축인 국민당과 사회당은 지난 30여 년간 정권을 주고받으며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스페인 국민은 무능과 부패 구조의 핵심인 양당 체제에 철퇴를 가하는 파격적 선택을 했다. 좌파 신생 정당인 포데모스(Podemos·우린 할 수 있다)와 중도우파 신생 정당인 시우다다노스(Ciudadanos·시민들)가 각각 69석과 40석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키면서 기존의 양당 체제는 4당 체제로 재편됐다.

 최근 들어 스페인 경제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지만 여전히 실업률은 21%로 유럽연합(EU) 국가 중 가장 높은 편이다. 청년 실업률은 50%에 육박한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기득권만 움켜쥔 채 민생을 외면하고 있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쓸모없는 낡은 도자기 팽개치듯 양당 체제를 산산조각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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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정이 불가피한 구도가 됐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4당 체제에 합류한 신생 정당들은 기존 주류 정당과의 연정에 부정적이다. 결국 낡은 정치 세력과 손잡으려 표를 달라고 한 것이냐는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 내전 때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상호 불신 탓에 국민당과 사회당의 대연정 가능성도 희박하다. 따라서 제1당인 국민당이 소수파 정부를 구성하거나 조기 총선을 통해 선거를 다시 하게 될 공산이 크다. 어느 경우든 정치적 불안정과 이에 따른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EU의 5번째 경제대국인 스페인의 정국 동향을 유럽 국가들은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분노와 환멸로 치면 한국이 스페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화장을 고치고 간판을 바꿔 달아도 지역과 인물 중심인 한국 양당 체제의 근본 성격은 변하지 않고 있다. 영남 중심의 낡은 중도보수 정당과 호남 중심의 낡은 중도진보 정당이 말로는 국민을 앞세우면서 각자 제 밥그릇 챙기기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유권자들의 바닥을 드러낸 인내심을 생각하면 스페인 유권자들처럼 양당 체제를 박살 내는 특단의 선택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유권자들을 주머니 속 공깃돌처럼 여기는 양대 정당의 오만에 대한 분노가 폭발 일보 직전이다.

 양당 체제의 균열은 이미 시작됐다. 친노와 비노, 주류와 비주류의 지겨운 집안싸움 속에 유력 대선주자 중 한 명인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 신당 창당에 나섰다. 친박과 비박으로 갈라져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는 새누리당도 내년 총선을 앞둔 공천권 다툼 때문에 분열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양당 체제가 3당 또는 4당 체제로 재편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한국과 스페인은 다르다.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무조건 여당이 된다. 총선 결과에 따라 설혹 여소야대가 되더라도 집권당은 여당이다.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는 직선 대통령이 있는 한국과 의원내각제인 스페인은 권력 구조 자체가 다르다.

 스페인에서는 기성 주류 정당에 몸담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들이 들고일어나 양당 체제를 무너뜨렸지만 한국에서는 양대 정당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신당 창당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큰 차이다. 스페인의 신생 좌파 정당 포데모스를 이끌고 있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37)는 정치학 교수 출신의 뉴페이스다. 중도우파 신생 정당인 시우다다노스의 알베르토 리베라(36) 대표는 변호사 출신 신인 정치인이다.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중심으로 여전히 패가 갈리고, 현직 대통령의 의중이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한국의 정치 풍토는 누가 봐도 비정상이다. 누군가 깃발을 들어야 한다. 기성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은 참신한 인물들이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서 낡고 썩은 양당 체제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일시적 대가를 치르더라도 길게 보면 그게 나을 수 있다. 정치를 외면하고, 손가락질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의 이글레시아스, 한국의 리베라인지 모른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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