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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폭력의 결정판으로 떠오른 수조원

중앙일보 2015.12.26 15:36
중국 홍색예술의 경전인 ‘수조원(收租院)’은 신중국 문화폭력의 결정판이었다. 1950년대 말, 정치폭력이 난무했다. 예술계는 한술 더 떴다. 창작을 중요시하던 사람들이다 보니 뭐가 달라도 달랐다. 사실을 부풀리고, 없던 일 만들어내는 솜씨가 정치가들 뺨칠 정도였다. 수사기관 못지 않게 증언과 증거도 중요시했다. 없어도 개의치 않았다. “없는 건 만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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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캉(西康)성 주석 시절, 공자(孔子) 탄신일을 맞이해 교사들에게 연설하는 류원후이. 1944년 8월 캉딩(康定·현재 쓰촨성 장족 자치주의 중심도시). [사진 김명호]

예술이란 가면 쓴 홍색 예술의 경전
없는 증거도 만들어 계급투쟁 조장
류원차이를 철저히 농민의 적 묘사
젖먹이 후손까지 도끼 습격에 희생

공포를 동반한, 문화폭력이라는 괴상한 유령이 중국 하늘을 휘감았다. 수조원이 공개되자 류원차이(劉文彩·유문채)의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둘째 손자 류스웨이(劉世偉·유세위)는 4000리 떨어진 신장(新疆)으로 이주했다. 현지 농민들은 악덕 지주의 후예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밧줄 들고 몰려와 목을 매달았다. 부인과 두 아들에게는 도끼 세례를 퍼부었다. 큰 아들 두 살, 작은 아들은 젖먹이였다.

최근, 중앙미술대학 교수 한 사람이 당시를 회상하며 가슴을 쳤다. “수조원의 성공은 대중의 우매함을 만 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류원차이가 예술을 통해 가공되자 박해가 합법화 됐다. 혁명의 이름으로 지주와 반혁명 분자들을 학대하고 도살했다. 인신 모욕은 기본이었다. 혁명은 광견병과 흡사했다. 자신이 반혁명으로 몰릴까 두려워 미친 듯이 위대한 수령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남 깎아 내리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부자·형제·부부·사제 간에도 몰래 밀고했다. 공개적으로 관계를 청산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진상은 밝혀지기 마련, 문화혁명이 끝나자 수조원 창작 과정이 드러났다. 상부의 지시를 받은 쓰촨(四川)미술학원의 예술가들은 자료 수집에 나섰다. “민간인들에게 뛰어들어라. 빈곤층과 동거동락하며 류원차이의 악랄했던 행동을 청취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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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원` 국부, 구넝산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노인을 후려치는 마름의 모델이 됐다. [사진 김명호]


예술가들은 류원차이의 머슴이었던 사람을 방문했다. 계급투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장황히 설명하며, 류원차이의 죄상을 맘놓고 얘기하라고 부추겼다. 머슴은 사실만 얘기하겠다며 말문을 텄다. 류원차이에 관한 좋은 얘기만 늘어놨다. 예술가들은 들을 생각을 안 했다. 한바탕 화를 내고 자리를 떴다.

건너편 집에도 머슴 출신이 있었다. 이름은 구넝산(谷能山·곡능산). 키가 크고 건장했다. 체격에 흥미를 느낀 예술가들은 스케치북부터 펴 들었다. 류원차이의 학대에 반항하는 영웅의 형상으로 제격이었다. 온갖 혁명이론을 동원해 구넝산을 구슬렀다. 구넝산은 예술가들을 실망시켰다. 들고 있던 망치로 땅을 내려치며 화를 냈다. “내일 나를 끌어다 총살 시킨다 해도 내가 할 말은 하나 밖에 없다. 류원차이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음날 구넝산은 낯선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아들이 구술을 남겼다. “아버지는 노동개조 대상으로 몰렸다. 갇혀있는 동안 매일 밥을 해서 날랐다.” 앞집에 살던 머슴의 아들도 기록을 남겼다. “구넝산이 잡혀 갔다는 말을 듣자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50리 밖에 있는 산속에서 광부 생활을 했다. 쓰촨 미술학원의 예술가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구넝산은 예술가인지 뭔지 하는 것들에게 끝까지 저항했다. 예술가들은 천재였다. 구넝산의 기개 넘치는 모습을 저승사자처럼 탈바꿈 시켰다. 수조원을 관람한 사람은 노인에게 몽둥이 휘두르는 악질 마름의 모습에 경악한다. 나는 한 눈에 구넝산인 것을 알고 폭소했다.”

류원차이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책을 열심히 읽어라. 그 안에 금은보화와 온갖 미인이 있다”는 권독문(勸讀文)을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았다. 도박장에 가면 돈이 굴러 다닌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도박에만 열중했다. 불과 몇 년 만에 쓰촨성 도박계를 평정해버렸다. 친동생 류원후이(劉文輝·유문휘)는 형과 딴판이었다. 낮에는 말 위에서 활 시위 당기고, 달이 뜨면 경전(經典)과 병서(兵書)를 펴 들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학교도 육군 소학과 육군 중학을 거쳐 바오딩(保定) 군관학교를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난세의 군인은 죽지만 않으면 진급이 빨랐다. 쓰촨 독군(督軍)으로 부임했을 때 형 류원차이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형은 홍수전이 황제를 칭할 때 사용하던 용상에 앉아 나를 맞이했다. 형수 다섯 명이 포드 승용차를 한대씩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부하들에게 훈시할 때마다 공자와 쑨원(孫文·손문)을 초상화를 걸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소문을 들었던지 내게 핀잔을 줬다. 공자는 뭐고, 쑨원은 뭐냐. 모두 실패한 사람들이다. 배우지 마라. 지금 중국은 여자 교육이 중요하다. 내가 멋있는 여학교를 세울 테니 두고 보라며 큰소리를 쳤다. 형은 농민들에게 관대했다.”

형제에게는 류샹(劉湘·유상)이라는 조카가 있었다. 류샹은 군에서 류원후이보다 두각을 나타냈다. 1911년 청 제국 멸망 이후 10년간 계속된 쓰촨 군벌 전쟁의 마지막 승자는 류샹이었다. 류원차이는 동생 류원후이와 우애가 유별났다. 류원후이가 조카 류샹과 쓰촨의 패권을 놓고 다툴 때 중재 요청을 거부했다. 미수에 그쳤지만, 충칭(重慶)에 있던 류샹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파견할 정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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