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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소통자’ 레이건, 편지 5000통으로 난관 돌파했다

중앙일보 2015.12.26 01:16 종합 1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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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가 블로그에 올린 은퇴편지 첫 화면.

지난달 29일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37)는 ‘농구에게(Dear Basketball)’라는 제목의 편지를 인터넷에 올렸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1996년 고졸 루키로 NBA에 데뷔한 뒤 20년간 LA레이커스에서만 뛰며 우승을 다섯 번 한 수퍼스타다. 1413자로 작성된 편지에서 그는 “올해가 현역으로 뛰는 마지막 시즌”이라고 밝혔다.

편지로 대중 설득하는 미국 리더들
“제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레이건 손글씨로 공개 … 국민들 감동
저커버그, 딸에게 “좋은 세상 만들 것”
빌 게이츠도 전 임직원에게 e메일

 “여섯 살 내가 아버지를 따라 선수용 양말을 무릎까지 올려 신던 순간부터, 그레이트웨스턴포럼(LA레이커스 홈구장)에서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슛을 성공시키는 상상을 했을 때부터, 나는 이 한 가지만은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농구와 사랑에 빠질 거라는 사실을….”

 농구를 의인화하며 자신의 31년 농구 인생을 마치 연인에게 고백 편지를 쓰듯 풀어냈다. 은퇴를 언급하는 단락에선 아쉬움과 애틋함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내 심장은 여전히 뛰고 내 마음은 여전히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내 몸은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 스포츠방송 ESPN은 “이기적 플레이, 성추문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던 코비가 은퇴사 하나로 안티팬 모두를 다시 그의 팬으로 돌려놓았다”고 말했다.

 편지는 말이 아니라 글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말에 비해 절제미가 있다. 편지 한 줄 한 줄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울림을 주는 까닭이다. 소통이 부족한 한국 사회와 달리 미국 지도층에선 전통적으로 편지가 강력한 설득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8세기 말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정치인들이 작성한 헌법 해설본 ‘페더럴리스트 페이퍼’가 대표적이다. 알렉산더 해밀턴(초대 재무장관), 제임스 매디슨(제4대 대통령) 등 당시 대농장주·상인을 대표한 세력들이 뉴욕주 시민들을 상대로 미국 연방제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쓴 일종의 서한 묶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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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건국 시기의 전통은 20세기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어진다. 1980년대 소련을 붕괴시키고 미국 경제를 다시 일으킨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대표적인 ‘편지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미국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창립자 휴 헤프너, 딸 패티, 그리고 보통의 미국 시민들까지 각계 각층을 대상으로 편지를 보냈다. 커론 스키러 카네기멜런대 교수는 레이건이 쓴 편지 약 5000통 가운데 1000여 통을 간추려 『레이건: 편지 속의 삶』이란 서한집을 내기도 했다.

 94년 11월 발표된 ‘내 친애하는 미국 국민들에게(My fellow Americans)’는 레이건 식 편지 커뮤니케이션의 정수다. 주치의로부터 알츠하이머 선고를 받은 레이건 자신과 낸시 여사를 비롯한 가족, 보좌진은 이 소식을 국민에게 공개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알츠하이머를 공개할 경우 카리스마 넘치는 레이건의 이미지에 손상이 갈 것이 자명해서다. 결국 레이건이 스스로 결정했다. 손수 영문 필기체로 편지를 작성해 공개하기로 했다. 수신자는 미국인 전부로 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최근 제가 알츠하이머(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수백만 명의 미국인 중 한 명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뇌세포를 파괴해 기억력을 상실케 하고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알츠하이머이지만 레이건의 어조는 담담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두 문장은 당파를 넘어 미국민 모두를 감동시켰다. “저는 이제 인생의 황혼을 향해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항상 빛나는 아침을 맞을 것이라 믿습니다.” 레이건에겐 지금까지도 ‘위대한 소통자’란 별칭이 붙는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레이건의 편지는 90년대 미국에 알츠하이머라는 불치병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도 레이건 특유의 낙관주의, 미국식 애국주의가 묻어 나와 그에 대한 향수를 극대화했다”고 설명했다.

 21세기에 들어와 손편지는 정보기술(IT) 사회에선 블로그·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형식을 바꾼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겸 기술고문이 이런 활동에 적극적이다.

 지난달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딸 맥스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Our Daughter)’에는 저커버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미래 세대에 더 나은 미래를 물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이다. 편지에서 그는 “우리는 너와 어린이들 모두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적었다. 또 저커버그는 “우리 부부가 보유한 페이스북 지분 99%(약 52조원)를 생전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편지에는 약 3시간 만에 ‘좋아요’ 45만 건, 댓글 약 3만4000건이 달렸다.

 게이츠 역시 편지 커뮤니케이션에 능하다. 올 4월 MS 창립 40주년을 맞아 게이츠는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e메일을 보냈다. 여기서 그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술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초연결사회’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에겐 기술이 너무 복잡하고 비싼 까닭이다. “모든 사람이 기술의 힘에 접근할 수 있게 하자. 서로 서로가 연결되게 하자. 컴퓨터가 어느 곳에나 존재하게 하자. 지난 40년 동안 모두의 노력으로 수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다.”

 미국 경영인들의 e메일 커뮤니케이션은 경영 효율을 높이면서 수평적인 인터넷 시대를 상징하는 도구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대다수 한국 기업과 달리 미국은 회장 또는 창업자가 직접 나서 자신의 개인사·일상을 편지로 소개한다”며 “신문·방송 등 매스미디어로 도달할 수 없는 일반 대중에게 편지로 ‘마이크로 커뮤니케이션’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소셜 미디어가 발달함에 따라 편지를 통한 미시적이고 세밀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다시 주목받게 됐다는 의미다.

 스포츠 선수 등 대중 스타들도 이 같은 방식으로 팬들과 소통한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자신의 편지를 올린 곳은 언론이 아닌 ‘플레이어스 트리뷴’이라는 블로그였다. 전 메이저리거 데릭 지터가 은퇴 직후 개설한 플레이어스트리뷴은 야구·농구·미식축구 등 전·현직 프로스포츠 선수 약 400명이 자신의 글을 직접 올리는 곳이다. 데릭 지터는 “뉴욕 양키스 주장을 11년간 지내면서 신문과 방송의 자의적인 해석에 지쳤다”며 “스포츠 선수가 자신의 생각을 왜곡 없이 전달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원했다”고 말했다. 시대를 이끄는 정치인·스타들이 ‘일 대(對) 다(多)’ 소통 형식으로 편지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미디어를 통하기보다 직접 발언함으로써 자신의 입장과 철학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연애편지가 성공하지 않듯 정치인·스타의 편지 또한 대중의 감성·지성을 관통했을 때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정희 교수는 “레이건은 편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여소야대의 의회, 공산주의 소련과의 대치, 진보 지식인 위주의 언론 환경과 같은 난관을 돌파해 냈다”며 “불통 사회에 갇힌 한국 사회 지도층도 이 같은 정치감각, 그리고 편지라는 형식에 담긴 커뮤니케이션 의지를 다시 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S BOX]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대표, 매달 한두 번 직원에게 e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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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左), 권영수(右)

한국에서도 미국적 경영 방식의 영향을 받은 경영자들은 편지 커뮤니케이션에 적극적이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대표는 2012년 10월부터 매달 한두 번씩 전 직원을 대상으로 e메일을 보낸다. 편지의 제목은 ‘MP(Managing Partner)의 편지’다. 서정춘 시인의 ‘30년 전 1959년 겨울’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도 편지에 곁들였다. MP의 편지는 경영 현안뿐 아니라 프랑스 식당, 순대국밥, 로마의 역사, 크리스마스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퇴사하는 직원들은 김 대표에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떠나게 되었지만 ‘MP의 편지’를 더 이상 읽지 못해 아쉽다”고 인사하기도 했다.

 올 연말 LG유플러스로 옮긴 권영수 부회장도 LG디스플레이에 재직 중인 2008년부터 매달 두세 차례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회사 임직원에게 ‘CEO 노트’를 발송했다. 회사 일을 수행하다가 다친 직원에 대한 위로부터 사회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망라돼 권 부회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했다. 서울대 최종학(경영학과) 교수는 “소통은 조직 내에서 정보가 공유될 수 있도록 돕고 임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해 기업의 효율성을 높여준다”며 “여러 경영학 교과서에서 ‘소통의 기업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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