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속으로] 삼성 사장단 올해 48회 강연 분석해보니

중앙일보 2015.12.26 01:14 종합 14면 지면보기
#1984년 12월 13일 오전 9시30분. 서울 태평로에 있는 삼성본관 28층 대회의실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장단 20여 명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었다. “50년대 창업해 살아남은 기업은 몇 안 됩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고 변신하는 능력이 있어서입니다. 삼성이 살길은 빠른 새 기술의 개발입니다.”

송호근 등 인문학이 40% … 데니스 홍 로봇, 권영근 바이오도
마지막 강연 정호승 시인이 맡아
KAIST 교수 등 과학 선생님 많아
인공지능 등 급변하는 신기술 파악

 #2015년 12월 23일 오전 6시20분.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 검은색 차들이 속속 들어섰다. 올해 열리는 마지막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출근을 하는 삼성 사장들의 차량 행렬이었다. 권오현(63)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총 52명의 삼성 사장단을 대상으로 사옥 39층에서 열린 이번 강연은 시인 정호승씨가 맡았다. 강연 주제는 ‘내 인생에 힘이 되어주는 시(詩)’. 1시간30분간 강연을 경청한 사장단은 짧은 토론 시간을 갖고 올해 모임을 파했다.
 
기사 이미지

 올해 삼성 사장단 회의가 막을 내렸다. 오랜 시간 삼성의 발전사와 함께해 온 삼성 사장단 회의 풍경은 80년대와 180도 달라졌지만 ‘삼성의 내일’을 준비하는 본질엔 변함이 없었다.

 올해 이뤄진 강연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변화다. 급변하는 미래상을 빨리 읽고 대비해 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지난 1월 7일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2015년 한국 사회 키워드’를 시작으로 삼성 사장단은 올해 수요일마다 총 48회의 강연과 토론에 총 96시간을 쏟았다.

 ‘마키아벨리,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현자’(김상근 연세대 교수)와 같은 인문학 강연(총 18회)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통일과 남북 경협’(조동호 이화여대 교수)이나 ‘생명과학과 인간의 미래’(송기원 연세대 교수)와 ‘UX(사용자 경험)로 보는 현재와 미래’(조광수 연세대 교수)처럼 신기술과 미래 사업, 시장 변화를 다루는 강연(총 12회)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기사 이미지
 5년 연속 빠지지 않고 ‘의무학습’처럼 사장단 강연 주제로 등장한 삼성SDS의 그룹 정보기술(IT) 체계 혁신과 삼성안전환경연구소의 안전환경 전략 발표를 제외하면 삼성 내부 인사가 강사로 등장한 건 손영권(59) 삼성전자 전략혁신센터(SSIC) 사장이 유일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2012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세운 전략혁신센터를 이끌고 있는 인물로 ‘개방형 사업모델’의 중요성을 사장단에게 강조했다. 손 사장은 삼성전자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꼽고 있는 사물인터넷(IoT) 청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5월 모든 기기와 사람을 인터넷으로 연결해주는 사물인터넷 시대를 위한 삼성전자의 ‘아틱(ARTIC)’을 선보였다. 영어 단어 ‘연계되다(Articulate)’란 단어에서 이름을 따온 아틱은 사물인터넷을 위한 개방형 플랫폼이다. 반도체와 센서를 비롯한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소프트웨어까지 하나로 묶은 것이 특징이다. 손 사장은 사장단에 활발한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빠른 시장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설명했다. “투자해 실패한다 할지라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스타트업을 적극 발굴하겠다”며 “혁신가가 되려면 외부 기술과 아이디어에 보다 개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은 지난 5월 이재용(47)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물려받은 뒤부터 사장단 회의 주제를 사업 밀착형으로 바꿨다. 급성 심근경색으로 지난해 5월 쓰러진 이건희(73) 삼성전자 회장을 대신해 이 부회장이 그룹을 대표하는 두 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모바일 결제 시스템인 ‘삼성페이’ 서비스 개시(8월), 통합 삼성물산 출범(9월)과 화학 계열사 매각(11월)까지 숨가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이런 사장단을 대상으로 한 강연 주제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 4월 ‘뇌과학과 인공지능의 기회와 리스크’(김대식 KAIST 교수)를 공부한 데 이어 7월(데니스 홍 미 UCLA 교수)과 8월(오준호 KAIST 교수)에 한 차례씩 ‘로봇’을 주제로 한 강연을 배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삼성은 99년 그룹 차원의 성장동력 육성을 위해 설립한 삼성벤처투자를 통해 올 초 세계 최초 가정용 로봇 회사인 지보(JIBO)에 투자하기도 했다. 지보는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연구진이 2012년 세운 벤처로 인간형 로봇(휴머노이드)을 개발하고 있는 곳으로 내년 초 실제 제품 판매를 앞두고 있다.

 모바일 결제 시장에서 애플·구글과 경쟁을 벌이는 삼성페이를 떠올릴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인호 고려대 컴퓨터통신공학부 교수를 초청해 지난 10월 ‘금융혁명, 디지털 화폐에 길을 묻다’는 강연을 듣기도 했다. 이 밖에도 삼성은 지난달엔 권영근 연세대 교수를 사장단의 ‘바이오 선생님’으로 초빙했다. 삼성물산이 최대주주(지분 51%)로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를 통해 ‘바이오 의약’ 사업을 본격화한 점을 감안한 행보다.

 
기사 이미지
 삼성 사장단 회의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이 모임이 삼성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되기 때문이다. 삼성 사장단 회의의 시작은 창업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 시절 삼성 계열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생겨났다. 73년까지만 해도 이 모임은 간담회 형식으로 매주 화요일 열렸다. 당시 ‘삼성 사장단 회의’로 불린 것은 이병철 회장이 연말에 주재하는 평가회의였다. 87년 11월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자 3남인 이건희 회장을 만장일치로 그룹 회장으로 추대한 곳 역시 사장단 회의였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퍼뜨린 동력도 이 모임이었다. 이 회장은 93년 3월 이틀에 걸쳐 사장단 46명과 도쿄에서 회의를 했다. 당시 일본 아키하바라 상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뒤쪽에 버려지듯 전시돼 있던 삼성 제품을 목격한 이 회장과 사장단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는 그해 7월 ‘신경영’ 선언의 촉매제가 됐다. 50개에 달하던 계열사를 절반으로 구조조정(94년)하는 결정을 내린 주체도 삼성 사장단 회의였다.

 외환위기와 함께 대기업의 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삼성은 98년 밀실 경영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삼성 비서실을 해체하고 사장단 회의는 정보 교류를 위한 간담회로 의미를 축소시켰다. 이후 삼성 특검으로 이건희 회장이 2008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자 사장단은 ‘삼성 사장단 협의회’란 이름으로 다시 삼성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올해 그룹 대표로서 활동을 시작한 이재용 부회장을 뒷받침하는 일도 삼성 사장단의 몫이다. 삼성 사장단은 지난 6월 삼성서울병원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전파의 진앙이 되자 회의에서 이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S BOX]  『아웃라이어』 『경청』 『왜 일하는가』
 
기사 이미지
 
기사 이미지
 삼성에서도 독서광으로 꼽히는 장원기(60) 중국삼성 사장과 윤용암(59) 삼성증권 사장, 김신(58)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이 삼성의 온라인 사보인 ‘삼성앤유’를 통해 올해 추천한 책들이다. 매일 아침 20분 반신욕 독서를 즐기는 장원기 사장은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유명한 맬컴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 일독을 권했다. 지난 198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2009년 디스플레이 사업을 하는 LCD(액정표시장치) 사업부 사장이 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추천했다. 사장이 되고 3년째가 되던 2011년 디스플레이 시장이 침체하면서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실적 부진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남는 시간’을 경험했다”고 했다. 책 읽기와 중국어 공부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6개월 뒤 중국삼성 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취임사를 중국어로 하겠다는 독한 목표를 세우고 중국어 공부에 들어가 취임 인사에 현지 직원과의 대화까지 중국어로 나눴다. 그는 “자신만의 전문성은 한 분야에 바친 시간을 쌓아야 이룰 수 있다”며 “전문성과 창조성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윤용암 삼성증권 사장은 박현찬의 저서 『경청』을 추천했다. 스마트폰에 4000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하면서 성격과 취미,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과 같은 작은 정보까지 입력해두는 그는 “경청이야말로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말했다. 그는 “경청은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하니 당신의 말로부터 배우겠다’라는 자세에서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김신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은 “진짜 리더가 되기 위해선 사람과 세상을 읽는 통찰력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감성이 필요하다”며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꼽히는 교세라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의 책 『왜 일하는가』를 권했다. 그는 “ 사회 초년생들에게 이 책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