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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여성 엄마 된 ‘성냥팔이 소녀’…남편·딸 넷 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중앙일보 2015.12.26 01:03 종합 1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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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복씨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품고 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65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본다. 1950년 12월 23일. 성탄 전전날, 6·25 포성이 한반도를 뒤덮던 때였다. 흑인 병사와 유엔군 차림의 한국인 청년이 열세 살 소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녀는 당시 경기도 부평 장마당에서 성냥과 양초를 팔고 있었다. 말 그대로 ‘성냥팔이 소녀’였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압록강 전투에 투입된다. 우리의 생명을 유산으로 주고 갈 사람을 뽑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느님께서 너를 선택해 주신 것 같다.”

[박정호의 사람 풍경] 갈 곳 없는 여성들의 벗, 이인복 전 숙대 교수
6·25 때 아버지 잃어 소녀 가장 생활
나 대신 죽은 흑인 병사·신학생 못 잊어
“어려운 여성 돌봐라” 어머니 유언
37년간 피해 여성들 수천 명 도와


 흑인 장병은 침례교 목사, 한국인 청년은 천주교 신학생이었다. 그들은 소녀에게 전투식량·담요·외투 등이 담긴 유엔군 배낭 네 개를 주고 갔다. “성당을 찾아가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아라. 우리가 살아 오면 너를 꼭 찾아올게”라는 말도 남겼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꼭 찾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보면 포화(砲火) 속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소녀는 지금 일흔여덟 할머니가 됐다. “두 분이 내 대신 굶어 죽고, 내 대신 얼어 죽었다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세 사람 몫의 삶을 살자’고 다짐해 왔습니다. 아직 이름도 몰라요. 하지만 그들은 해마다 성탄에, 아기예수님과 함께 제게 옵니다. 제 첫 번째 성탄의 추억이죠.”

 할머니는 이인복 전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다. 현재 나자렛성가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나자렛성가원은 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 피해 여성을 보호하는 쉼터다. 나락으로 떨어진 여성들을 돌보고, 그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이 이사장은 지난 40년 가까이 ‘먹을 것, 잠잘 곳 없는’ 여성들의 벗이요, 어머니로 살아왔다. 2015 성탄을 나흘 앞둔 지난 21일 서울 평창동 나자렛성가원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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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학으로 다닌 숙명여대 국문과를 수석 졸업하며 받은 은수저 두 벌. 그의 유일한 혼수품이기도 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두 번째 성탄의 추억을 든다면요.

 “미군 캠프가 있던 부평에는 성매매 여성이 많았어요. 무면허 간호사로 취직해 그들에게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일로 여동생 다섯과 어머니를 부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해 겨울, 병원을 나와 온종일 걸어 도착한 곳이 인천 답동성당이었죠. 그곳 신부님이 저를 재워주고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박문여중에 입학시켜 줬어요. 동생들과 함께 살라고 고아원에도 넣어 주셨고요.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죠.”

 - 올 성탄절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3년 전부터 경기도 동두천에도 여성공동체를 꾸려 가고 있어요. 평창동·동두천에 성탄 축하 떡을 보내고 아기 예수님을 경건하게 맞이해야죠.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지난 8일부터 내년 11월 20일까지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자비의 대희년’을 선포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의 사명인 자비정신을 심화시키자는 결단입니다. 저는 성탄절 하루 종일 기도하며 지낼 거예요. 숨 쉬는 것부터 자는 것까지 일거수일투족이 기도지만 이날은 특별히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할 겁니다.”

 - 원래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습니까.

 “아니요. 어릴 때엔 불교 가정이었어요. 6·25로 아버지와 오라비를 잃고, 허허벌판에서 흑인 병사와 신학생을 만난 게 전환점이 됐죠. 또 인천의 신부님을 만난 건 제게 구약의 탈출기에 해당합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저는 없습니다. 세례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학교를 졸업 못했을 것이고, 대학 교수도 될 수 없었을 겁니다.”

 - 소외 여성과 함께하게 된 계기라면요.

 “75년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유언 때문입니다. ‘부평에 성매매 피해 여성이 많아서 엄마와 네가 성폭행을 안 당했다. 그 언니들을 돌보며 살다 오너라’고 하셨어요. 78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돌아가시면서 ‘어려운 형편의 사람을 도와주라’는 메모를 남긴 걸 신문에서 읽었어요. 계시 같았죠. 그 즉시 집 나온 여성 몇 명을 받아 남편(심재기 전 국립국어원장·서울대 국문과 교수), 딸 넷과 함께 제 집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 자택에서요, 제법 불편했겠습니다.

 “가족들의 도움과 이해가 컸죠. 제가 의무감을 앞세우지 않았나, 지금은 미안한 마음도 큽니다. 규모가 커지면서 2000년에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했고, 2002년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면서 일시불로 받은 연금과 퇴직금 등을 더해 평창동에 5층짜리 건물을 짓게 됐습니다. 딸 넷의 혼수비용, 남편의 퇴직금도 고스란히 들어갔죠. 정확히 센 적은 없지만, 그리고 셀 일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수천 명 정도 거쳐간 것 같습니다.”

 - 대학 교수로서 가능한 일이었나요.

 “별명이 일벌레입니다. 남편은 ‘썰럼니스트(solemnnist·엄숙주의자)’라고 불러요. 썰렁하다는 거죠. 일만 하고 살았습니다. 노는 시간이 없었어요. 방학 때는 거의 매일 국내외 강연을 하며, 그 강연료로 시설 운영비를 댔습니다. 아마 지구 몇 바퀴를 돌았을 겁니다. 손가락 관절이 펴지지 않을 만큼 글을 쓰고 책을 번역했어요. 30권 가까이 냈는데 인세 수입도 전액 법인에 들어갔습니다. 초·중·고·대학 모임에 가본 일이 없어 친구도 별로 없어요. 늙어갈수록 옛 사람이 그리워지는데 말이죠. 요즘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 여섯 식구가 모두 사회복지사입니다.

 “복지사가 된 시기와 동기는 각자 다릅니다. 남편과 저는 사회복지사로서 인생 2막을 살기 위해 충북 청주 꽃동네대학에서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딸들은 전공이 영어학·종교학·영문학 등 각기 다른데, 어려서부터 어려운 여성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하나 둘씩 자격증을 땄어요. 요즘 제 곁에서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가 죽을 때 자식들에게 짐을 남기진 않겠습니다. 칼릴 지브란(1883~1931)의 시처럼 자녀는 부모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이들이 자유인으로 살도록 어미의 삶을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 왜 버림받은 여성을 택했나요.

 “누가 제 나이를 물으면 서른일곱이라고 말해요. 피해 여성들과 함께 살며 새로 태어났다는 뜻에서죠. 그들은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구조적 결함으로 생겨난 피해자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에도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이를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써 있잖아요. 저를 지켜준 건 기지촌 여성입니다. 그때 진 빚을 갚을 뿐이죠. 나눔은 덕이 아니라 생명의 의무입니다.”

 - 그래도 개인 재산을 거의 다 내놓았는데요.

 “그게 아니죠. 교수 월급, 강사료, 책 인세, 후원금 등은 ‘저만의 재산’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의 한 푼 한 푼이 모인 거죠. 일단 법인을 세우면 설립자는 법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없어집니다. 개인 자산을 출연하기에 앞서 직계가족의 유산 상속 포기각서도 있어야 합니다. 법인 설립 당시 딸들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이들 모두에게 유산 포기 각서를 등기우편으로 받았어요. 사위들이 ‘저런 엄마는 처음 봤다”고 했다던데, 지금은 모두 이해한다고 해요.”

 - 모두들 살기가 퍽퍽하다고 합니다.

 “중산층이 축소되고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사람들이 화를 많이 내는 것 같아요. 일반 후원금도 계속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예컨대 동두천 쉼터의 경우 국고 보조가 없어 살림이 매우 빠듯합니다. 이제 기력의 한계를 느껴요. 제도적 문제도 큽니다. 사회복지 기부금은 전액 소득공제가 됐는데 관련 법이 최근 바뀌면서 기부금의 30%만 세액공제를 받아요. 기부문화에 찬물을 부은 셈이죠. 이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어떻게든 버텨내야죠. 항상 기도를 하면서요. 오늘의 저를 만든 건 10할이 기도이니까요. 그러면서 차분히 선종(善終)을 준비하겠습니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어머니가 들려준 타고르의 기도문, 30년 들어 대학 교수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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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인도 시인 타고르, 윤동주, 한용운.

이인복 이사장이 평생 의지해 온 건 문학이다. 스스로 “문학은 구원 자체”라고 말했다. 가장 큰 위안이 됐던 이는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다. “어머니께서 어려서부터 ‘타고르의 기도문’을 들려주셨죠. 제가 쓰러지려 할 때마다 이 시가 저를 일으켜 세웠어요. 이 기도문을 하루 들어 하루 살고, 10년 들어 10년 살고, 30년 들어 드디어는 박사학위도 받고 대학 교수도 될 수 있었어요.” ‘타고르 의 기도문’ 일부를 인용한다.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이 이사장은 한국 시인으로 윤동주(1917~45)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특히 윤동주의 ‘십자가’가 고난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했다. ‘십자가’는 이렇게 끝난다.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는 “이 시를 읽고 괴로움은 행복의 또 다른 표현임을 가슴에 새겼다”고 했다.

 한용운(1879~1944)과 정지용(1902~50)도 빠뜨릴 수 없다. 이 이사장은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를 읽으며 일제에서 독립한 자유국가에서 살 게 된 걸 감사하게 됐고, 정지용의 ‘향수’를 외며 6·25 때 헤어진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다른 작품도 많아요. 일일이 셀 수 없죠. 문학은 제게 수도(修道)와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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