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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일기장은 힘이 세요

중앙일보 2015.12.26 00:10 종합 2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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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올해도 딱 일주일 남았으니 슬슬 신년 결심을 할 때가 되었다. 새해엔 운동을 해야지, 살을 빼야지, 담배를 끊어야지, 외국어를 배워야지, 책을 많이 읽어야지 등등. 나도 마찬가지다. 박사과정 공부를 더 열심히 하자, 방학에는 구호 현장에서 일하자, 꽃과 나무 이름 100가지 이상 외우고 익히자, 한 달에 한 번은 꼭 암벽등반 하자….
 

일기장에 속마음 쓰는 게 치유
즐겁고 기쁠 때보다는
괴롭고, 힘들고, 억울할 때 길어져
9권의 책은 모두 일기장이 바탕 돼


 이렇게 결심한다고 모두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목표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새해를 맞는 설렘이 커진다. 외국의 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새로운 결심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목표 달성률이 10배 이상 높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25%는 일주일, 35%는 한 달, 50%는 6개월 안에 포기한다니 역시 새해 결심은 작심삼일이야, 라고도 하겠다. 하나 이 통계가 내게는 매우 고무적이다. 50%가 포기했다면 나머지 50%는 반년이 넘도록 목표를 향해간다는 말 아닌가? 6개월 내로 포기한 사람들도 그 시간이라면 살은 빠질 만큼 빠졌고, 외국어 실력도 많이 늘었고, 책도 수십 권 읽었을 거다. 끝까지는 못했지만 새해 계획을 세운 덕분에 그 정도라도 이루었으니 남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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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 중 새해 결심으로 권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이라는 질문을 받았다.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일기 쓰기요! 일기장이 내 인생에 말할 수 없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과는 크게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고, 그 삶은 지금처럼 다채롭지도 ‘도전과 응전’으로 흥미진진하지도 않을 거다.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겨울방학 그림일기 숙제 때문이었다. 그림을 못 그리는 나는 일기의 반 이상을 글로 채워야 했다. ‘밤새 눈이 와서 세상이 온통 새하얗다. 오늘 하느님 물감 통에는 하얀색이 동이 났겠다.’ 이런 엉뚱한 글을 담임선생님이 칭찬해 주셨고 나는 그게 신나서 더 열심히 일기를 썼다. 6학년 때까지 일기장 검사 때마다 ‘참 잘했어요’를 받은 덕에 매일 일기 쓰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다.

 아깝게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쓴 일기장은 이사를 다니면서 잃어버렸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쓴 100권 넘는 일기장은 모두 가지고 있다. 갖가지 모양과 크기의 일기장들이 내 보물 1호이자 경험과 생각과 결심의 기록이다. 세계에는 세계사가 있고 국가에는 국사가 있다면 내게는 나의 역사책인 일기장이 있다. 가끔 독자들이 내 책을 읽으면 내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하는데, 맞는 얘기다. 9권의 책 모두 일기장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이다. 참말이지 일기장이 아니라면 난 단 한 권의 책도 쓸 수 없었을 거다.

 일기장이 기록의 기능만 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권하겠는가? 많은 심리학자는 일기 쓰기의 치유 기능도 대단하다고 말한다. 얼마 전 읽은 글쓰기 치유에 관한 책도 편지 쓰기와 일기 쓰기를 적극 권했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쓰는 ‘가상의 편지’와 함께 일기장에 속마음을 써 내려가는 과정 자체가 치유라고 강조했다.

 100% 공감한다. 일기 쓰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즐겁고 기쁠 때보다는 괴롭고 힘들 때, 분하고 억울할 때 일기를 훨씬 길게 쓰게 된다는 걸. 그런 날 일기를 쓰려면 깊이 파인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쓰리고 아프다. 그래서 일기장 위로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하고 엉엉 소리 내 울기도 한다. 그러나 그 거친 울음이 몇 번의 딸꾹질로 마무리될 때쯤이면 놀랍게도 속이 후련해진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 일기 쓰기를 결심하고 공책과 볼펜을 준비하는 동시에 치유도 시작된다. 그러면 살면서 누구라도 예외 없이 받는 마음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할 것도, 그 무거운 돌덩이를 가슴에 안고 살 필요도 없어진다. 일기장에다 실컷 투덜거리고 어리광 부리고 미운 사람은 마음껏 욕하면 되니까. 이렇게 한풀이하듯, 고자질하듯 한바탕 쓰고 나면 거짓말처럼 속이 시원하고 정신도 맑아지면서 기분이 확 좋아질 거다. 이게 바로 ‘자가 힐링’이다.

 그뿐인가. 이렇게 매일 쓴 일기장은 연말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나는 한 해 마무리로 그해에 쓴 2, 3권의 일기장을 일독한다. 일기장을 읽노라면 일 년 동안의 즐거움과 괴로움, 뿌듯함과 아쉬움이 비디오를 보듯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늘 가슴이 뭉클해진다. 올해도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기도 덕분에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고마움 때문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한 해를 닫을 수 있다는 자체가 감사한 일, 이게 모두 일기장 덕분이다.

 일기 쓰기! 이게 좋은 건 알겠지만 며칠 쓰다 말 것 같아 못하겠다는 사람을 많이 봤다. 그래도 마음먹었다면 일단 시작해 보는 거다. 밑질 게 전혀 없다. ‘가다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하리라’가 아니라, 가다 중지해도 ‘간 만큼’은 이익이니까!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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