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힘내.” 다른 위로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힘내”를 주고받았다. 그때 나는 힘내라는 말이 가진 뚜렷한 한계를 깨우쳤다. 딱히 그 다음에 이어질 만한 말이 없다는 거였다. “힘내”라는 말에 “무슨 수로?”라는 대답은 어울리지 않았다. “너도” 또는 “그래, 파이팅” 정도가 그나마 자연스러웠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에 “언제?”라고 되물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결혼한 지 석 달쯤 지났을까. “앞으로 우리끼리 힘내라는 말은 하지 말자.” 나는 보이콧을 선언했다. “힘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이미 한껏 힘을 내고 있는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고!” 그러고는 소파에 쭈그려 앉아 엉엉 울었다. ‘돈 내라는 말보다 싫은 말이 힘내’라는 노랫말을 만든 타블로는 천재가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시트콤이지만 그땐 슬펐다.
2년 전 울던 나를 다시 떠올린 건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생의 유서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할 때 근거도 없는 다 잘될 거야 식의 위로는 독입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그에겐 대체 무슨 말이 필요했던 걸까. 그의 유서를 몇 번 더 곱씹었다. ‘힘들 때 전화해, 우리 가까이 살잖아. ** 누나의 이 한마디로 전 몇 개월을 버텼습니다.’
돌이켜보면 내 해결책도 비슷했다. 한밤중에 퇴근하는 남편에게는 “딸기주스 마실래?”라는 말을, 취업이 안 돼 죽겠다는 후배에겐 “취업해도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는 말을 전했다. 의미도 재미도 없는 얘기들이지만 예전보다는 나아졌다. 나는 딸기주스 한 잔이 불러오는 배 속 든든함이, 진심이 담긴 독한 조언이 가져오는 위로를 믿는다.
요즘 빠져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큰 국제대회를 앞두고 있는 택이가 덕선이에게 묻는다. “나 져도 돼?” 덕선이가 웃는다. “응, 져도 돼.” 이 드라마에서도 힘내라는 말보다 “라면을 먹자”거나 “같이 가자”는 말이 더 흔하다. 새해엔 힘내라는 ‘헤픈 엔딩’은 잠시 보이콧해 보는 것도 좋겠다. 찾아보면 그거 말고도 할 수 있는 말과 일이 많다.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