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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삼키는 공부

중앙선데이 2015.12.20 01:12 458호 22면 지면보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화제다. 쌍문동 골목에서 옹기종기, 옆집 수저가 몇 개인지 알고 사는 모습이 정감을 불렀다. 등장 인물 모두 흥미로운데, 그중 성균과 미란의 장남 6수생 정봉이 눈길을 끈다. 후기 대학마저 떨어진 정봉이 낙담하고 방에 처박혀 있자, 성균이 “밥은 먹여야하지 않냐”며 위로를 한다. 정봉이 고개를 들자 책상 위에는 먹던 과자가 있었다.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공부만은 못한다. 시험이 다가와도 불안해 하는 것은 가족뿐이다. 정작 본인은 무덤덤한 정봉은 어찌보면 기이한 캐릭터다.



6수생은 드라마적 과장이지만 실제 2015년 한국에서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정봉 같은 학생을 자주 만난다. 고전적인 시험 불안이나 실패로 인한 우울증이 아니라 무기력 속의 평온함이 문제였다. 부모는 속이 타지만 본인은 태평하다.


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일러스트 강일구



이런 학생들도 처음에는 시험을 앞두고 불안해 하며 잘해야겠다고 자책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몸과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성대로 공부를 하지만 이미 몇 번씩 본 교재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뇌는 자극받지 않는다. 그저 1년을 무사히 보내 다음 시험 때까지 머리 안에 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싶을 뿐이다. 시험 성적이 안 나오면 배가 아파서, 옆 사람이 재채기를 해서, 감독관이 돌아다녀서 망쳤다고 한다. 부모는 해 온 것이 아까우니 일년 더 해보자고 결의한다. 생기를 잃어버린 공부 기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실수도 반복되면 실력이라 인정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손을 털어야 하지만 그게 안된다. ‘손실혐오’ 때문이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한 노력보다 손실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마냥 낙관적으로 보면서 현재의 삶을 유지하려 한다. 두 번째는 ‘매몰비용’이다.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그 비용을 묻어두고 나올 수 없기에 합리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무른다. 그 결과는 관성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이다. 정봉이는 3월이 돼서 또 공부를 한다고 앉아 있고, 엄마의 측은지심을 노려 용돈을 타내 오락실을 간다. ‘공부중’이란 푯말만큼 강력한 방어막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유일하게 부모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변명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공부는 진짜 뭘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공부 중인 한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는 자기 위안과 정신 승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공부가 인생을 삼킨 셈이다.



이를 부추기는 사람은 486세대인 부모들이다. 자기들의 성공 방식을 자식에게 따르라고 강요하며, 밑빠진 독일지 모르는 공부에 노후를 희생해가며 물을 붓고 있다. 우리 사회가 동력을 잃어가는 데에는 이런 비합리적 믿음이 영향을 주고 있다. 이제는 벗어나야만 한다. 드라마의 삽입곡 ‘걱정말아요 그대’에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라고 노래한다. 그 말을 곱씹지 않으면 자식은 ‘공부중’이란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현실에서 붕 뜬 사람이 된다. 부모 역시 암울한 노후라는 악몽이 현실화될 것이다. 사람만 좋은 정봉이는 드라마에서만 보면 좋겠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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