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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렇던 유신시절, 프로들 뭉쳐 ‘바둑 권력’에 저항

중앙선데이 2015.12.20 00:33 458호 26면 지면보기

조치훈(왼쪽)이 사카타 9단과 결전을 벌이고 있다. 75년 당시 한국 바둑계는 물론 사회 전체가 조치훈의 활약에 크게 고무되었다. [한국기원]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1975년 한국기원이 5명의 프로기사를 제명 처분했다. 41명에 달하는 기사들의 사퇴서도 수리했다. 프로들은 농성했고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도 신문에 실어 사태는 사회문제로 번져갔다. 당시는 유신체제. 시대 분위기는 차가워 여럿이 모이면 불순하다고 낙인 찍힐 때였다. 사건은 중앙정보부에도 알려졌다. 아래에서 말했다. “잡아넣을까요.” 바둑을 잘 아는 고위층이 있었다. “그냥 둬.”


[반상(盤上)의 향기] 프로기사 파동

기사파동이었다. 바둑계의 오늘을 만든 사건이었다.



처음은 아니었다. 56년 한국기원 이사회는 제4회 승단대회 직전에 승단 대국 수를 두 배로 늘렸다. 승단이 너무 쉽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대국 수가 많아지면 지방 기사들은 숙식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 기사들은 대회를 거부하고 조남철의 송원기원으로 모였다. 내친 김에 한국기사회를 만들었다. 당시 자유당의 실세 장경근이 이사장으로 위세가 있었지만 기사들은 세계일보와 함께 국수순위전(國手順位戰)을 만들어 57년 1월 독자적으로 시합도 시작했다. 이사회는 승단 규정을 원위치로 되돌렸다.



 



한국기원이 밥그릇마저 뺏자 분노60~70년대 바둑은 돈이 되지 않았기에 기사들은 가진 것이 없었지만 잃을 것도 없었다. 많은 기사들이 생활의 불안을 토로했지만 밥그릇마저 빼앗아가는 행태가 한국기원엔 있었다. 74년엔 사무국장의 착복이 드러났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분노했다. 74년 10월 기사들은 처우 개선과 함께 처벌을 요구했다. 1차 파동이었다.



처음엔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겼고 잘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최영근 이사장과 기사회장 김인 7단이 대화를 했고 12월 20일엔 합의점도 도출했다.



한국기원으로 복귀한 기사들은 기사회를 열었다. 실무이사로 김인 7단과 김수영 4단, 홍종현 4단을 선출해 기원 사무국의 사무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사회의 견해는 달랐다. ‘아직은 아니다. 합의일 뿐이다. 정관의 규정대로 정식 절차를 거쳐야 이사로서 집무할 수 있다.’



이사회와 기사의 의견이 달랐다. 이사회는 기사회가 선출한 3인 대신에 김봉선과 김인을 이사로, 강철민과 고재희를 감사로 선출했다. 기사 연구수당도 조정했다. 74년 12월분 기준으로는 62%, 반액으로 인하했던 때를 기준하면 92%로 조정했다. 은퇴 위로금 문제도 별도 기금 조성안을 모색 중이라 했다.



문제는 점차 확연해졌다. 연구 수당이나 은퇴 위로금, 대국료 인상 등 처우 개선은 사소한 문제였다. 핵심은 기사들의 실권 있는 실무 참여 여부였다. 기사들은 그들이 선출한 기사에게 한국기원 운영의 실권을 넘기라 했다. 하지만 이사회는 점진적인 개혁을 종용했다.



새로 기사회장을 맡은 윤기현 7단과 하찬석 6단 등 기사 대표와 새로 사무국장에 취임한 박재열이 숙의 끝에 ‘운영위원회’ 신설안과 예비 선임한 위원 멤버를 75년 2월 하순에 열린 이사회에 올렸다. 하지만 이사회는 위원회를 ‘운영협의회’로 수정하고 멤버도 김인 7단, 윤기현 7단, 홍종현 4단에 정창현 7단, 하찬석 6단을 추가로 선출했다. 기사파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일부 기사가 또 빠졌다.



기사들 사이에서 실권 없는 운영협의회의 무용론이 나왔고 수습 과정에서 쌓였던 불만들이 다시 한 번 폭발했다. 2차 파동이었다. 3월 1일 기사 일동의 이름으로 일간신문 광고란에 이사장 이하 전 이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이에 이사회는 전체 67명의 기사 중 5명을 제명 처분하고 사퇴서를 수리했다. 기사들도 분열했다.<표1> 김인 7단과 강철민 5단은 어느 쪽에도 가담을 거부했다. 이를 두고 당시 신문기자들은 “사태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점을 엿볼 수 있다”고 썼다.



 



기사들의 대한기원으로 기전 몰려관철동 한국기원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에 중국집 중원장이 있었다. 기사들이 자주 다녔던 집이다. 바로 그 건너편 빌딩 4층에 사퇴한 기사들이 75년 3월 대한기원 간판을 내걸었다. 한국 바둑계가 두 개의 기단으로 나뉘는 순간이었다. 1950년 일본 바둑계가 일본기원과 관서기원으로 갈라섰듯이.



대한기원은 『기도(棋道)』 잡지를 독자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했고 나름 정당성도 확보했다. 입단대회를 열었을 때 많은 아마추어들이 한국기원을 버리고 대한기원 입단대회에 참가했다. 모든 신문기전도 한국기원을 나와서 대한기원 주관을 택했다. 대한기원이 창립된 75년 프로 기전은 모두 10개였다. 국수, 명인, 왕위, 기왕, 국기, 패왕, 최고위, 최강자, MBC국기전, TBC왕위전. 한국기원은 한국기원 선수권전을 75년 부랴부랴 급조했다. 한국기원이 돈을 댄 단 하나의 작은 기전이었다.



 

황용주(오른쪽) 대한기원 이사장과 최재형 한국기원 이사장이 통일 한국기원의 출범을 앞두고 서로 축하하고 있다. [한국기원]



조치훈 붐 겹쳐 연구생 희망자 급증분열은 서로에게 좋을 게 없었고 기사들도 서로 다툴 이유가 없었다. 본래 한 뿌리였다.



76년 3월 28일 제28회 한국기원 이사회는 기사들이 반대한 이사장을 퇴진시키고 최재형 유원산업 회장을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월간 『바둑』은 이사회의 결정을 큰 화보로 다루면서 통합을 예상했다. “바야흐로 무르익어가는 기계 통합의 염원에 하나의 상서로운 구름인가”



8개월이 흐른 76년 12월 1일 한국기원 이사장 최재형과 대한기원 이사장 황용주가 손을 잡았다. 오후 6시 15분 통합식을 거행했다. 최재형 이사장은 “앞으로 기사 중심으로 한국기원을 운영해나갈 체제를 갖춘 것을 기뻐한다”고 치하했다. 독자로부터 답지한 축전과 편지가 편집부 책상에 가득했다. 『바둑』 77년 1월호는 화보를 크게 냈다. “통일 한국기원의 출범.” 2년 여에 걸친 기사파동이 마침내 끝났다.



통합식에는 새로운 한국기원 정관이 선포되었다. 핵심은 23~25조였다.<표2>



기원의 실무를 담당할 실무이사를 프로기사가 맡는다는 것이 골자였다. 기사들의 승리였다. 76년 12월 15일 통합 후 첫 이사회가 열렸다. 이사장에는 최재형, 실무이사에는 총무 김인 8단, 출판 정동식 4단, 섭외 홍종현 4단이 선출됐다.



월간 『바둑』이 기사와 기자들의 좌담회를 열었다. 이런 말이 오갔다. “기사파동 동안 재정 부문에 손실이 적지 않았다. 과거엔 기사와 기원은 별개라는 느낌도 들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바둑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높아졌다. 기사들에게 이런 어려운 사정이 있었구나. 조치훈 붐도 계속되고 있으며 신문의 보도 경향만 봐도 바둑을 다루는 비중이 눈에 띄게 커졌다. 연구생 지망자 수도 부쩍 늘었다.”



 



기사파동 거치며 바둑계 저변 확대70년대 초 기전의 숫자는 늘어났고 바둑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좋아졌다. 늘어나는 바둑 인구는 기사들에게 격려로 전해졌다. 경제 성장에 따른 직업의 분화가 이뤄져 기사들 스스로 정체성의 질문도 찾게 됐다. 그런 사정이 바둑계를 자극했다.



파동은 기원 사무국의 부정(不正)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것이 문제였다면 사무국장 등 한두 명만 기원에서 축출하면 되었다. 기사들은 2년을 이사회와 줄다리기 했다. 바둑의 저변이 넓어져 기사들에게 힘이 생겼다. 그 힘을 기원 운영의 참여로 쓰고자 했다. 기사파동은 바둑계의 저변 확대를 기반으로 프로 바둑계가 자각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기사파동을 가라앉힌 것은 실무이사 제도였다.

기보 백1이 조치훈이 자부한 묘수로 하변 백이 살아갈 배경이 되었다. 백3 이후는 숫자 순으로 바둑이 진행되었다. 만약 백1, 흑2 교환이 없다면 10은 11에 막을 수 있다.



과연 실무이사 제도는 성공했을까. 바둑이 성장 가도를 달릴 때엔 성공 여부를 알기 힘들다. 바둑계는 기사파동과는 별개로 이미 성장 궤도에 올라 있었다.



운도 좋았다. 일본에서 조치훈이 80년 명인이 되고 82년 기성이 되어 바둑계 1인자에 올랐다. 기보는 조치훈이 명인을 획득한 바로 그 바둑. 그의 명인 등극은 국민들의 자부심을 크게 높였고 바둑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꿨다. 조훈현이 89년 제1기 응씨배 세계대회를 우승했다. 바둑계는 발전의 정점에 올라섰다.



90년대엔 더욱 성장했다. 하지만 거품이 많았다. 내용이 부실한 바둑책이 범람했다. 커진 외형에 비해 내용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은 만만찮았고 인터넷 혁명으로 신문기전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사의 수만 해도 302명. 70년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실로 많은 것이 변했다. 기사파동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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