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는 무채색 배우 무한 변신을 꿈꿉니다”

중앙선데이 2015.12.20 00:33 458호 16면 지면보기
“근데 왜 경감이 제일 멋진 거야?”

뮤지컬 ‘레미제라블’



국내 초연 3년 만에 돌아온 공연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사실 ‘레미제라블’이 그렇다. 대체로 주인공에게 명곡이 집중되는 여타 뮤지컬과 달리 주조연에게 골고루 대표곡이 있고, 주인공 장발장의 존재감은 오히려 튀지 않는다. 장발장의 숙적 자베르 경감의 이미지가 더 강렬하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다. 자베르가 모든 남자 배우들의 로망인 ‘별(Stars)’을 부를 때, 배우에 따라 객석의 호응은 천양지차다. 영화판에서 대배우 러셀 크로의 자베르도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섹시한 자베르 경감 김우형

한국의 자베르는 ‘섹시’하다. 초연 당시 학생 대표 앙졸라로 나와 혁명을 이끌다 이번엔 ‘학생놈들’과 대치하는 자베르로 180도 변신한 뮤지컬 배우 김우형(34). ‘지킬 앤 하이드’ ‘아이다’ ‘고스트’ 등 대극장 뮤지컬에서 활약해 온 대표적인 주연 배우 중 하나지만 뚜렷한 개성보다는 다소 전형적인 주인공 이미지로 통해온 그다. 그런데 올 들어 창작뮤지컬 ‘아리랑’의 친일파 악역으로 나와 팬들을 놀래키더니 이번엔 자베르의 카리스마로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데뷔 11년차를 맞은 그를 변하게 한 건 뭘까.



 



“제가 좀 앳됩니다.”



고뇌하는 자베르는 알고 보니 무한긍정의 유쾌한 남자였다. 무대에서보다 젊어 보인다고 말을 거니, 수염을 깎으면 더욱 앳되단다. 20대 중반부터 큰 무대에서 큰 배역만 맡아온 탓에 평소 ‘노안’으로 통해 왔지만, 30대가 되니 더 이상 늙지 않는다며 “배우에겐 원래 노안인 게 낫다”는 주장이다. 적당히 성숙하면서도 패기만만한 인상이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 넘는 자베르 역할을 하기에도 수월했을 터다.



사실 그는 2012년 초연 당시 자베르를 지원했지만 앙졸라로 낙점됐다. 이번에도 장발장 오디션을 봤지만 자베르가 된 특이한 사연이 있다. 초연과 다른 배역으로 출연하는 유일한 배우기도 하다. “초연 때는 자베르를 하고 싶었는데 어리다고 앙졸라 제안을 받았어요. 외모보다 깊이와 내공의 문제였겠죠. 그것도 제 실력이고요. 그런데 초연을 하다 보니 장발장이 너무 멋있더라고요. 음악적으로나 연기적으로나 최고난도인 데다 강약을 다 다루는 섬세한 역할이라 배우로서 욕심이 났죠. 초연 때 개봉된 영화에도 자극을 받았고요. 휴 잭맨이 솔직히 너무 멋있잖아요. 저런 섹시하고 멋진 장발장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그런데 역시나 제 그릇이 아직 모자랐나 봐요.”



2005년 ‘그리스’의 대니 역할로 데뷔한 이후 늘 주연만 해온 그에게 초연의 앙졸라는 진기한 경험이었다. 분량이 적을뿐더러 여러 개의 앙상블까지 함께 소화해야 했던 것이다. “자베르에 뜻을 두고 있었으니 앙졸라는 고민이 됐어요. 당시 다른 큰 작품을 버려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연기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 작품은 하나의 꿈과 로망이었거든요. 어떤 역할로 돋보인다기보다 그저 작품에 속해보고 싶었죠. 그런데 정말 좋은 경험이 됐어요. 몰랐는데 연습을 하다 보니 앙상블을 7~8개나 해야되는 거예요. 앙상블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무척 힘들면서도 재밌었어요. 지금의 앙졸라에게도 앙졸라만큼 재밌는 배역이 없다고 진심으로 얘기하죠.”



날카로운 고음으로 혁명가를 부르는 앙졸라에 비해 묵직한 중저음의 바리톤으로 무대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자베르는 고음에 강한 그에게 큰 도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후하고 풍성한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 많았다고. “로우 바리톤 음색을 처음 내봐요. 몸통을 많이 울려야 하고, 고음도 없는 건 아니어서 굉장히 폭넓은 소화력을 가져야 하구요. 그런데 성악 전공한 형들이 제 바리톤을 듣고는 이 소리를 극복하면 앞으로 고음이 더 잘날 거라고 격려해 주더군요. 기본이 되는 소리를 내고 있다는 얘긴데, 저도 앞으로 어떤 소리를 더 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자베르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신념이 강한 인물인 만큼, 평생 추구해온 신념이 깨지자 고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전개도 배우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결코 쉽지 않다.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영상과의 조합으로 마법처럼 만들어내는 추락장면은 그 절정이다. “자살 장면은 정말 힘들어요. 비명을 지르며 장치에 끌려가는데 숨이 막혀 머리가 터질 것 같죠.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요. 테크닉적으로도 아주 조심해야 되요. 다리 위에서 노래하다가 순식간에 장치와 몸을 정확하게 맞춰야 하거든요. 위치가 조금만 빗나가도 사고가 나거나 장치가 노출되죠.”



그가 추구하는 자베르는 ‘섹시한’ 자베르다. 딱히 자베르라서가 아니고 모든 역할을 다 섹시하게 소화한다는 게 그의 신조다. “배우는 섹시한 느낌이 있어야 되거든요. 할리우드 배우들은 조지 클루니처럼 나이 들수록 멋지고 섹시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자베르는 젊어서부터 늙은 역할까지 해야 되는데, 늙어서도 중후한 섹시함을 보여주고 싶은 거죠.”



“뮤지컬 경험 쌓일수록 두려워져요” 서울예대에 재학 중이던 2004년, 김우형은 친 누나인 뮤지컬 배우 김아선이 출연한 ‘지킬 앤 하이드’ 초연을 보고 뮤지컬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다. 졸업 후 처음 도전한 ‘지킬’ 오디션에 덜컥 합격했고, 같은 기획사의 작품 ‘그리스’로 실전 감각을 익힌 후 곧바로 2006년 최고의 배우 조승우·류정한과 함께 ‘제 3의 지킬’이 됐다.



“그땐 무서운 게 없었어요. 그분들을 보고 뮤지컬을 시작한 건데 같이 하면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죠. 그런데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더 두려워져요. 젊을 땐 그 자체가 너무 좋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게 부족했던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그에겐 두 가지 꿈이 있었다. 그런데 데뷔와 동시에 첫 번째 꿈인 ‘지킬’을 이루고, 2010년엔 두 번째 꿈 ‘아이다’로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해 버렸다. 그의 배우 인생에 좌절이나 난관은 없었던 걸까.



“30살 때 거의 관둘 뻔 했어요. ‘아이다’를 하는데 그냥 모든 게 힘들더군요. 어릴 땐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는데, 그런 게 쌓이면서 한계가 왔나 봐요. 꿈의 작품에서 제 그릇이 모자란 걸 느끼니 이 길이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그런 마음을 위로하듯이 큰 상을 받고 마음을 다잡게 됐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노래 공부부터 체계적으로 시작했죠. 부끄럽지만 그전엔 노래를 배운 적이 없었거든요. 일단 공부를 시작하니 안 좋은 습관을 버리면서 얻게 되는 게 많더군요. 역시 날 바라봐주는 누군가는 있어야 되나봐요. 파바로티도 돌아가실 때까지 스승이 있었다잖아요.”



올해는 ‘나쁜 놈’ 역할만 하는 해 몇 년 새 뮤지컬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작품이 많아지면서 남자배우들은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바쁘게 활동하지만, 김우형은 결코 다작을 하지 않는다. 올해도 ‘아리랑’과 ‘레미제라블’이 출연작의 전부다. 비우고 채우는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배역이 있다면 1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할 정도라니, 운만 좋아 성공한 배우는 분명 아닌 듯하다. 지난해 ‘조로’ 이후 4~5개월간의 긴 휴식 끝에 선택한 배역은 창작뮤지컬 ‘아리랑’의 친일파 양치성이었다.



“올해는 좋은 놈 나쁜 놈 구분 짓자면 나쁜 놈만 하네요. 기획사에서 처음엔 당연히 의병대장 송수익을 맡기려다가 모험을 해보자고 제의했고, 저도 대본을 읽는 순간 ‘저는 양치성입니다’라고 했어요. 내가 이걸 꼭 해야겠다, 싶었죠. 전형적인 주인공보다 배우로서 좀 더 강한 느낌이나 확 바보 같은 느낌처럼 재밌게 연기할 수 있는 역할에 욕심도 있고요. 사실 원래 제 기질이 양치성에 가까워요. 지금까지가 거짓으로 작품을 한 거죠.(웃음)”



‘그렇다고 제가 나쁜 놈은 아니’라고 재빨리 수습하는 그는 양치성 역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다’고 표현했다. ‘창작이니 얼마나 재밌었겠느냐’는 것이다. “오랜만에 창작을 했거든요. 캐릭터를 스스로 다 만들어야 하니까 너무나 재밌죠. 아, 역시 이래서 창작을 꼭 해야겠구나 싶었어요. 업계에서도 좋은 창작물을 계속 만들어서 배우들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어요.”



어떤 역할이나 무난히 소화하는 탓인지 ‘무채색의 배우’라는 평을 듣지만 “배우는 아무 색깔이 없는 게 좋다”고 긍정했다. 다양한 역할에 대한 자신감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돌아가신 서울예대 김효경 선생님이 제게 모든 걸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거든요. 어릴 때 스승님이 제게 말씀해주신 게 있어요. 너는 아무 색깔이 없다. 그게 너무 좋고, 그래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씀이 당시 제게 콕 박혔어요. 내 장점으로 살려 나가야겠다 결심했고, 그래서 어떤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결과는 몰라도 늘 믿음과 자신감이 있어요. 저 옷을 입어보면 되지, 싶은 거죠.”



그런 자신감으로 ‘레미제라블’에 또 출연한다면 꼭 장발장에 도전하겠단다. 작품과 함께 계속 발전해 가겠다는 의지다. “‘레미제라블’은 이제 30년이 됐으니 거의 클래식이잖아요. 요즘 나오는 작품들이 오히려 고루하고 식상해지는 추세에 비해 늘 새롭고 더 좋아지는 걸 보면 정통 클래식이 가진 힘을 새삼 느껴요. 또다시 한다면 저도 또 도전해야 될 것 같고, 막연하지만 또 새로운 걸 하고 싶어요. 이번엔 장발장을 꼭 하고 싶은데 다음 시즌엔 그릇이 아직 안될 것 같고, 그 다음 시즌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레미제라블 코리아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