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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그리울까, 쌍팔년도식 감성이…

중앙선데이 2015.12.20 00:30 458호 27면 지면보기

5인조 그룹 ‘동물원’. 1995년도 모습이다.



‘응답하라 1988’이 세간에 화제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프로그램의 본방을 사수해 본 적이 없다. 일단 집에 케이블 TV가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매주 시간 맞춰서 TV 모니터 앞에 앉아 있을 자신도 없다. 소문만 듣던 내가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드라마 속 음악 때문이었다. SNS에 ‘응답하라 1988’에 나왔다며 올라오는 노래들이 속칭 ‘추억 돋게’한 것이다. 우연이지만 극중 주인공들처럼 88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애써 세대론으로 말하자면 ‘끄트머리 486세대’거나 쉰살을 바라보는 ‘신세대’인 셈이다.


[with 樂] 드라마 ‘응팔’이 되살린 동물원 2집

 

동물원 2집



그 해 88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4등을 한다. 환상의 복식조라는 양영자 현정화의 금메달로 난데없이 탁구장이 붐비고 있을 즈음 예상치 않은 음반이 하나 나온다. 노란 바탕에 펜으로 그린 듯 한 소년이 앉아 있는 음반, ‘동물원 2집’이다. 대한민국 100대 음반에도 늘 들어가는 명반이다. 드라마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동물원 LP를 꺼내 들었다. 예전에 좋아했던 음반이지만 최근에는 플레이어에 올려본 기억이 없다. 앨범 속 히트곡이자 드라마에 리메이크되어 최근 라디오에 자주 나오는 ‘혜화동’은 B면 마지막 곡이었다.



이 곡을 듣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비평준화지역에 살던 나와 친구들은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동물원의 새 노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가 흘러나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조급증이 났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문을 닫으려던 3평 남짓한 동네 레코드점에서 ‘동물원 2집’을 달라고 외쳤지만 주인의 대답은 “그 친구들 2집이 나왔니?”였다. 위성도시에 사는 고등학생이 그 음반을 손에 쥐기까지는 2주는 더 기다려야만 했다.



동물원은 산울림의 김창완이 발굴한 그룹이다. 그는 85년 최성수·임지훈과 함께 ‘꾸러기들’ 이라는 포크 가수들을 선보였다. 이들이 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실력파 포크 신예들이었다면 동물원은 아직 대학교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가요계에 새로운 감성을 전해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그들의 노랫말을 사랑한다. 이들은 누구나 경험했을 만한 젊음의 성장통을 노래한다. 지나고 나면 한 때인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무엇보다 절박한 그런 상념들이다. 사랑, 꿈, 정체성, 성찰, 그리고 희망이 그들의 노래에 가득하다.



개인적으로는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건반을 연주하는 박기영이었다. 다른 멤버들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음반에는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가 두 곡 실려있다. B면을 시작하는 ‘별빛 가득한 밤에’와 ‘잘가’이다.



동물원의 멤버인 김창기가 일상의 철학자이고 유준열이 엉뚱한 상상가라면 박기영은 그저 순수한 소년 같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한다. “어릴 적 보고팠던 그런 세상을 잃어버린 나의 세상을 이 밤 다시 볼 수 있다면.”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20대의 고민과 순수 그리고 무언가 달라지고 싶어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이어지는 노래는 ‘잘가’이다. “차마 작별에 말 못하고 눈물 어린 눈짓으로 보내니 잘 가, 잘 가. 지난날의 설렘, 이젠 내게 다시 없으리.”



아무래도 아날로그식 이별은 동물원에서 끝난 게 아닌가 싶다. 이후 그는 다른 멤버들처럼 90년대 초반 솔로 음반을 한 장 낸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백마에서’라는 노래와 ‘우리가 어느 별에서’라는 노래가 아름다웠다. 이 중 ‘백마에서’는 동물원 5집에 다시 수록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솔로 음반 버전이 낫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첫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노래를 들으며 기차에 올라야 할 것만 같다.



8곡이 수록된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곡이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을 가진 ‘동물원’이다. 멤버들이 한 소절씩 나누어 부른다. 고인이 된 김광석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고무풍선을 움켜쥔 아이와 하품하는 사자들과 우리 안을 맴도는 원숭이는 지나온 내 모습이었지.” 노래 가사가 지금보니 의미심장하다. ‘응답하라 1988’시절의 고등학생이 아저씨가 되는 동안 내 안의 동물원에는 더 많은 원숭이와 사자와 늑대와 여우가 모여 살게 된 것 같아서이다.



올해 유행한 단어인 ‘사축’(社畜), 즉 회사에서 일하는 가축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좁은 세상 안에서 타인을 물어뜯고 비웃고 또는 득의양양하며 산 것은 아닌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아무것도 사랑한 적이 없어서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것은 아닌지?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아 괜히 감상적이 된 것일까? 꿈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시절, 그들의 노래를 듣다가 홀로 가슴이 서늘하여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듣던 노래를 다시 찾아 듣는다면 사람들은 대개 아저씨들의 추억 뜯어먹기 정도로 취급한다. 복고니 퇴행이니 하는 상표도 따라 붙는다. 하지만 옛 노래가 주는 편안함과 익숙함도 음악이 주는 위안이자 대중음악의 힘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어떤 노래들은 그 시절의 마음으로 현재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주기도 한다. 20대 청년이었던 동물원이 중년이 된 내게 건넨 이야기들도 그렇다. 그룹 동물원은 한국 포크 록의 클래식이 될 것이다.



 



엄상준 KNN방송 PD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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