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극한 치닫는 계급투쟁, 무덤서 끌려나온 류원차이

중앙선데이 2015.12.20 00:24 458호 29면 지면보기

20여년 가까이 ‘수조원’은 중공의 교육기지였다. 문혁 시절인 1974년, 수조원을 참관하는 상하이 민병들. [사진 김명호]

류원차이와 류원후이는 쌍둥이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류원차이(그림)는 제대로 된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대약진운동 시절인 1958년 겨울, 쓰촨(四川)성 다이(大邑)현 안런(安仁)진에서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엄동설한에 삽과 곡갱이를 든 청년들이 거대한 호화 분묘를 파헤쳤다. 시신을 강가에 패대기 치고 불살랐다. 폭죽 소리와 환호성이 요란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7-

사망 9년 후, 무덤에서 끌려 나온 류원차이(劉文彩·유문채)는 일세를 풍미했던 대지주이며 거상이었다. 현지 정부는 류원차이의 옛집을 “지주장원진열관(地主莊園陳列館)”으로 탈바꿈 시켰다. 계급투쟁의 열기가 극에 달했던 시절, 반면교사감으로는 딱이었다. 선전과 교육 효과도 노렸다. 지역 선전부에 지시했다. “유원차이의 진면목이 어땠는지는 알 필요도 없다. 악덕 지주의 표본으로 만들어라.”



선전의 귀재들이 창작력을 발휘했다. 거꾸로 매달린 채 두들겨 맞는 농민과 부녀자 강간, 산 사람 매장, 유아 살해 등 잔혹한 광경을 밀랍으로 만들어 진열관에 전시했다. 솜씨가 어찌나 뛰어났던지 관람객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악질지주 류원차이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지하실에는 붉은 물을 채운 감옥도 만들었다. 인형이긴 했지만, 핏물 가득한 창살 안에서 절규하는 농민과 살벌한 고문 도구를 본 관람객들은 흐느꼈다. 온종일 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진열관은 상급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하루아침에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계급투쟁 교육기지’로 둔갑했다. 머리가 묘하게 돌아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밀랍 인형은 생동감이 떨어진다. 우리 중국인들은 진흙을 잘 다룬다. 악덕 지주의 조세(租稅)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참상을 니소(泥塑·흙인형)로 만들자”는 건의가 줄을 이었다. 성 정부는 탁견이라며 쾌재를 불렀다. 1965년 6월, 쓰촨미술학원 조소과 교수를 중심으로 ‘수조원(收租院)’ 창작조를 구성했다.



성 선전부와 문화국은 현장으로 떠나는 창작조에게 단단히 일렀다. “지주계급의 죄악을 폭로하는 것이 창작의 최종 목표임을 명심해라. 수조원을 모든 착취계급은 물론, 구 사회와 연결시켜라. 수조원의 주인공 류원차이를 수천 년 간 내려오는 지주계급의 대표로 만들어라. 너무 터무니없어도 안 된다. 류원차이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집안에 불당 차려놓고 잠도 부처님 앞에서만 잤다. 한 손에 염주 들고 장부 뒤적거리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농민들이 반항하면 움찔하는 모습도 빼놓지 마라. 겉은 이리와 호랑이 같지만, 내심은 얼마나 허약한 지를 잘 표현해야 한다.”



쓰촨미술학원은 베이징에서 거행된 조소 전람회에서 이목을 집중받은 적이 있는 명문이었다. 정치적 임무였지만, 교수와 학생들의 출발점은 예술 창작이었다. 조소계에 혁명을 기대했다. 농민들 중에서 모델을 찾고 참여를 독려했다. 물 감옥을 경험했다는 노파의 경험담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순진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노파가 선전부원이 일러준 대로 주절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창작조는 방문과 관찰을 거쳐 100여명에 이르는 피착취자의 형상 재현에 성공했다. 작품이 완성되기 까지 4개월이 걸렸다.

류원차이의 권력은 동생 류원후이에게서 나왔다. 1939년 시캉(西康)성 주석 시절의 류원후이 부부. [사진 김명호]



같은 해 10월 1일 국경절, 류원차이의 옛집에서 수조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3일간 2만여 명이 참관했다. 한결같이 “니소 예술의 극치”라며 찬사를 보냈다. 둘째 날 깔끔한 새 옷으로 단장한 할머니 여섯 명이 나타났다. 그중 한 할머니가 들고 있던 대나무 지팡이를 치켜들고 유원차이의 머슴으로 보이는 흙 인형 앞으로 달려갔다. 당장 내려칠 기세였다. 창작에 참여했던 학생이 황급히 제지했다. “사람이 아닙니다. 흙 인형입니다.” 아무리 말려도 할머니는 듣지 않았다. “3일간 걸어왔다. 흙 인형이건 뭐건 때려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다.” 뭔가 수상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



베이징과 톈진의 조각가들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수조원 제작자들과 합세해 복제품을 만들었다. 마오쩌둥 생일 이틀 전인 12월 24일, 베이징 미술관에 수조원이 등장했다. 3일 만에 2개월 치 입장권이 동나버렸다. 25일은 영하 18도였다. 눈까지 내렸지만 표 구하려는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미술관 주변에 계엄을 선포하고 국민당 전범들을 참관시켰다. 참관을 마친 전범들은 좌담회를 열었다. 힐끔힐끔 눈치 보며 지난날 자신들의 죄과를 반성했다, 개중에는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찬양이 쏟아져 나왔다. 문혁 전야였다. 몇 개월 후, 문혁의 도화선이 될 중앙서기처 서기 캉성(康生·강생)의 평이 압권이었다. “보면 볼수록 뛰어난 예술품이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도 이보다 뛰어난 작품은 없다.”



후에 쓰촨성에 편입된 시캉(西康)성 전 주석 류원후이(劉文輝·유문휘)는 류원차이의 친동생이었다. 정부의 고위직에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입도 벙긋 못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불평을 늘어놨다. “형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훌륭한 교육자였다.”



사람은 말년이 중요하다. 류원차이의 말년을 알던 사람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계속>



 



김명호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