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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슴 찧는 소리

중앙선데이 2015.12.20 00:12 458호 34면 지면보기
연말이 되자 선생은 난감하다. 평소에도 궁핍한 살림이지만 한 해가 저무는 이맘때면 가계경제도 결산이란 걸 해보는데 수입은 늘지 않고 지출만 늘었다. 게다가 연말에는 이런 저런 행사가 있을 테니 생계는 더욱 각박해질 것이다.



선생은 돈 버는 일에는 뜻도 없었지만 소질도 없었다. 세상 일에 무능했다. 『맥베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세상을 속이려면 세상처럼 보이세요.” 세상과 같아져야 세상의 이익을 취할 텐데 선생은 세상과 달랐다. 음악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했다. 낮이고 밤이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짓는 일이 전부였다. 신라 자비왕 시절이라면 저작권이니 음원 수입 같은 게 없었으므로 선생이 지은 곡은 동전 하나, 쌀 한 톨 만들지 못했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가난했으므로 선생은 검소했다. 악기 외에는 그 무엇도 탐하지 않았다. ‘견물’해도 ‘생심’하지 않았다. 특히 옷에 대해서는 고집이 심해, 성인이 되어 마련한 옷 하나로 평생을 버텼을 정도다. 소매가 낡고 깃이 떨어지면 몇 번이고 기워 입었다. 보다 못한 부인이 갖다 버리면 다시 주워 오고 찢어 버리면 기워 입었다. 정말 백 번 기워 입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선생을 두고 ‘백 번을 기웠다’는 뜻으로 ‘백결(百結)’이라 불렀다. 선생은 당시에 이미 하나의 패션 스타일을 선보인 것이다.



이웃들은 세밑이라고 해외여행을 간다, 파티를 한다, 별식을 만든다 하면서 분주하고 소란스럽다. 경제에 무능한 가장은 안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부인이 허전한 가계부를 펼쳤다 덮었다 하면서 한숨을 쉰다. “우리는 무엇으로 연말을 보낼까?”



비록 빈한하게 살지만 선생은 어휘가 풍부하고 문자속이 깊다. “무릇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있으니 그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거늘 그대는 무엇을 그리 상심합니까. 부인을 위하여 거문고로 오늘 방아 찧는 소리를 짓겠습니다.”



가난한 집에 울리는 현악기 연주 소리라니. 안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 아니라 심금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듣고 ‘방아 음악’이라는 뜻으로 ‘대악(?樂)’이라 불렀다고 하나 현재 이 곡은 전하지 않는다.



흔히 사람들은 백결 선생의 부인이 바가지를 긁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사모님이 무서운 기세로 바가지를 긁었다면 어찌 선생이 거문고를 꺼내 방아곡조를 작곡하고 연주할 엄두를 내었겠는가. 아마 한 소절을 퉁기기도 전에 성난 사모님이 거문고를 부수어 불쏘시개로 썼을 것이다. ‘대악’에는 원래 가사가 없었을까? 있었다면 거기에는 방아 찧는 소리보다 아내의 말이 들어있었을 것 같다.



 



대악(?樂) - 아내의 말어둑한 방 안 구석으로만 자리를 잡는 당신의 그늘어디 봉창이라도 여셔요한 움큼 적셔줄 저녁 햇살 저리 불그레한데자꾸 무엇이 그렇게 미안하나요 당신은덩더더쿵 흥겨운 이웃들의낭자한 웃음 들으며 마당귀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제가가난한 화단의 겨울 꽃이파리 끝에서 머뭇거리는 저녁 햇살한 오락 오락 헤아리던 제가 그렇게 짠해 보였나요 이웃들은 이 세밑이 흥겨운데마냥 흥에 겨운데 저도오늘 저녁엔 고운 술 한 상으로 훗훗한 당신 가슴에 부끄럽게 안기고 싶었는데그런 눈물 당신이 그만 보았나요낭산 기슭으로 번지는 당신의 가락차마 못 듣겠어요이 저녁 당신은 의젓한 가락으로 저를 품는데몹쓸 저는 무엇으로 당신을 위로하나요 아니어요 서러운 것 아니어요 그런데 왜 이리도 가슴이 답답하나요오늘 밤은 아무래도 덩더더쿵 당신 가락에 얹혀 청청한 가락만 밟고 다니다 숨찬 휘몰이께에 이르면 어디훠이 훠이 울어나 볼래요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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