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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처럼 바다처럼 빛이 빚어낸 예술 신세계

중앙선데이 2015.12.20 00:09 458호 8면 지면보기

툰드라의 ‘나의 고래(My Whaleㆍ2015)’, 카드보드와 프로젝션 등, 950 x 600 x 360 cm. 러시아 선박에 설치됐던 작품을 재현한 것으로 마치 고래 뱃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서울 한남동에 새로운 ‘놀이터’가 생겼다. 대림문화재단이 설립 20주년을 맞아 지난 5일 오픈한 디뮤지엄이다. 통의동을 핫플레이스로 만드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한 대림미술관의 동생이라고나 할까. 대림미술관은 2011년 칼 라거펠트 전시를 시작으로 린다 매카트니에 이어 헨릭 빕스코브에 이르기까지 미술과 패션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해왔다. 밤이면 파티와 콘서트 공간으로 변신하는 ‘굿 나잇(GOOD NIGHT)’ 프로그램도 이끌어 왔다. 2012년엔 한남동에 있는 버려진 당구장을 개조해 ‘구슬모아 당구장’이라는 실험적인 전시공간도 만들었다. 그러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면적 2431㎡, 층고 8m의 미로 같은 공간이 어떻게 새로운 기쁨을 줄 것인지에 대해.


서울 한남동 디뮤지엄 개관 특별전 ‘아홉 개의 빛, 아홉 개의 감성’

개관 특별전인 ‘아홉 개의 빛, 아홉 개의 감성(Spatial Illumination - 9 Lights in 9 Rooms·12월 5일~2016년 5월 8일)’에는 그 힌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한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전시장을 둘러본 중앙SUNDAY S매거진이 이 전시를 3개의 키워드로 재구성했다.



 

카를로스 크루즈 디에즈의 ‘색의 포화상태(Chromosaturationㆍ1965/2015). 1965년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선보인 작가의 대표작. 백색 공간에 RGB 빛을 채워넣는 클래식한 작품이다



문을 열 때마다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 빛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한 작품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그 공간 전체를 채워나가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를 9개의 방으로 구분한 건 나쁘지 않은 구성이었다.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졌으니까.



4번 방에 마련된 카를로스 크루즈-디에즈(92)의 ‘색의 포화상태(Chromosaturation)’는 라이트 아트란 무엇인가를 곱씹어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1965년 처음 만들어진 이 작품은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비엔날레 대상을 안기며 카를로스를 ‘라이트 아트의 거장’ 반열에 올려놨다. 3개의 공간에 RGB(빨강ㆍ초록ㆍ파랑)의 빛을 채워넣는 클래식한 작품이지만 착시의 기묘함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남는 잔상으로 인한 빛의 변화를 느낄 수 있으므로 같은 공간에 있는 관객이라 하더라도 각기 다른 이미지를 보고 있는 셈이다. 단, 흰색 공간에 얼룩이 지지 않도록 덧신을 신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감수해야 한다.

‘CMYK 월(CMYK Wallㆍ2013)’, 3D 프린티드 프레임과 LED, 27.3 x 20.5 x 34.7 cm.

‘CMYK 코너(CMYK Cornerㆍ2012)’, 3D 프린티드 프레임과 LED, 21.3 x 16.3 x 17.8 cm

우연한 기회에 LED의 세계에 입문한 작가 데니스 패런은 졸업작품이 2012년 네덜란드 디자인 어워드에 소개된 이후 램프를 활용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8번 방은 마음껏 뛰어놀아야 작품의 가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독일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데니스 패런(39)은 빛의 이면에 있는 그림자에 더욱 집중한다. “조명보다 그것이 줄 수 있는 효과에 더 관심이 많다”는 설명이다. 천장에 설치된 RGB 조명은 사람이 없을 때는 마치 색이 없는 것마냥 백색 공간을 비춘다. 하지만 공간에 사람이 들어서면 희한한 삼색의 그림자가 생겨난다. 파란 광원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는 빨강과 초록에 도달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노란색으로 나타난다. 관람객이 한 명 한 명 늘어날 때마다 더욱 다채로운 빛깔이 전시장을 캔버스 삼아 펼쳐진다. ‘빛을 쳐다보지 마세요(Don’t look into the light)’라는 작품 이름과는 반대로 관람객들은 모두 바닥을 보며 노랑, 파랑 그림자에 신기해하고 더 큰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사실 2010년 필립스에서 나온 리빙 컬러스 LED는 상업적으로는 실패한 제품이에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조금 더 차갑고 따뜻한 정도의 차이가 있는 백색 조명이지 컬러 조명이 아니었거든요. 여러 색의 음영이 생기니 제품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그게 제게는 영감을 주었고 덕분에 ‘CMYK 코너, CMYK 월’을 만들 수 있었죠. 이렇듯 사람이 빛을 컨트롤 할 수는 없지만 기술이 우리에게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데니스는 마침 기자의 반짝이 구두가 더 많은 색색 그림자를 만들어내자 이렇게 외쳤다. “보세요, 한국은 기술이 발전해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니까요!”



아날로그와 크리에이티브가 만날 때 라이트 아트를 이루는 한 축이 기술인 건 맞지만 반드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디지털로 점철시키지 않고 아날로그로 구현해 낼 수 있는 방안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1층에서 2층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마련된 덴마크 출신 디자인 듀오 스튜디오 로소의 ‘미러 브랜치 대림(Mirror Branch Daelim)’이 대표적이다.



작가 롤프 크누센(44)은 “빛을 소재로 한 작품은 프로그래밍된 경우가 많지만 우리 작품은 스테인리스와 스틸이 재료 그대로 살아있어 이번 전시 중 가장 아날로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커다란 나무의 가지마다 조그만 거울 수천 개가 이파리처럼 달려 있는 작품이다. 이번 디뮤지엄에 전시된 작품은 2009년 미국 보스턴의 호텔 로비에서 시작된 미러 브랜치 시리즈 중 하나다. 길이가 9m로 가장 길고 처음으로 컬러를 사용했다. 덕분에 “빛은 반사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철학처럼 반사된 살구빛 그림자는 천장 위로 또 하나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폴 콕세지의 ‘돌풍(Bourrasqueㆍ2015)’, LED와 종이, 11 x 9.5 x 7.5 m

2011년 프랑스 리옹에서 선보인 동명의 작품. 정원과 분수 등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한층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7번 방의 문을 열었을 땐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다. 폴 콕세지(37)라는 이름에 걸었던 기대치가 너무 컸던 걸까. 디뮤지엄에 자리잡은 ‘돌풍(Bourrasque)’은 2011년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빛의 축제에서 선보였던 작품과는 사뭇 달랐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설치돼 종이의 흩날림이 극대화됐던 작품은 실내의 어둠 속에서 한결 위축돼 있었다. 9개의 방 중 제법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칠흙같은 어둠이 바람이 살랑 살랑 이는 야외의 느낌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다른 배경을 설치할 마음은 없었냐고. 그는 “한 번도 고려한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처음엔 실내 어두운 공간에 설치한다고 해서 걱정했지만 관객이 들어오면 얼굴이 조명에 비치면서 작품 자체가 생기가 생기는 것 같다”고도 했다. 대신 그는 어떻게 이 작품이 탄생했고 발전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시작은 테이블이 먼저였다. 그는 메탈 시트가 접혀서 휘어진 모양의 테이블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휘어진 테이블은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계속된 실험 끝에 결국 그 아이디어에서 발전한 ‘돌풍’이 먼저 세상에 나왔다. 뜨거운 오븐에 구워낸 시트를 손으로 살짝 접었고 LED 조명을 가장자리에 붙여 빛이 투사되도록 했다. 이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고 중국 베이징에서는 빨간 강철로 만든작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고 그 사이에 새겨진 시도 읽었다. 조명 뿐만 아니라 의자 등 여러 가구를 함께 만드는 디자이너다운 재해석이었다. 폴은 “모든 디자인은 알맞은 조도를 필요로 한다”며 “결국 최후의 승자는 빛이라는 게 참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다”고 했다.



영국 런던에 스튜디오를 둔 그는 현재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구두 숍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며 중국 광저우에서 조각 디자인을 병행하고 있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엔 미국 마이애미로 날아갈 예정이란다. 그 와중에 “여행가방 디자이너들은 좀처럼 도전을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새로운 캐리어 디자인을 말하고 있으니,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불만족이 그의 디자인 작업의 원천인 셈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이 조금 아쉬우면 어떠하리. 우리가 그를 만났고, 그의 새 작품을 알게 됐으니 그 또한 수확 아닐런지.

올리비에 랏시의 ‘양파 껍질(Onion Skinㆍ2013)’, 비디오 프로젝션 등, 3 x 6 m. 붉은 색과 흰 색 선의 기하학적 변형이 3차원의 공간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빛과 소리가 만나면 시공간 개념 흐릿 빛을 눈으로만 느낄 수 있다는 것 역시 오산이다. 빛이 뿜어내는 시각적 이미지에 적절한 사운드가 더해지면 전혀 다른 공감각을 형성한다. 때론 심오한 우주로, 때론 광활한 바다로 관객을 안내한다. 이곳에서 시공간 개념이 흐릿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티스트 그룹 툰드라에서 비주얼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레츠시우스(왼쪽)와 알렉산드르 시니차.



6번 방에 마련된 러시아 아티스트 그룹 툰드라의 ‘나의 고래(My Whale)’는 지난해 모스크바에서 처음 선보였던 작품이다. 강 위에 개조된 선박 브루조브 호를 본 작가들은 한눈에 반했다. 하얀 선체는 단박에 고래를 떠올리게 했다. 선박 중앙 홀 아치형 천장에 장식된 1400개의 육각형 타일 역시 좋은 소재였다. 이들은 단초점 프로젝터를 사용해 다양한 색의 빛을 투사했고 타일의 반짝이는 무늬는 마치 고래 뱃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창 너머로는 모스크바의 야경이 보이고 시선을 위로 돌리면 신세계가 펼쳐지니 얼마나 이색적인가.



툰드라는 비주얼 파트 2명, 사운드 파트 3명으로 구성돼 있다. 작업 순서가 정해져 있기 보다는 그때 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으로 일한다. 알렉산드르 레츠시우스(31)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기존의 공간을 활용하는 걸 좋아해요. 고래의 관점에서라면 세상이 얼마나 다르게 보이겠어요. ‘더 보이드(The Void)’도 버려진 공장을 활용했던 작품이고요. 그래서 미리 준비하는 부분도 있지만 스테이지에서 머물며 작업하는 시간이 긴 편 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은 알렉산드르 시니차(25)도 거들었다. “마치 뮤직 밴드 같은 거죠. 이 파트는 브람스로 시작하자 이렇게 정해진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연주해 보고 함께 다듬어나간다고 할까요. 한 명이 누워서 작품을 바라보면 다른 사람들도 한 번 누워보는 거죠. 이 작품을 즐기기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요. 디뮤지엄에선 카페트가 깔려있지 않아 하기 힘들겠지만 최소한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사운드를 느껴보시면 좋겠어요.”



대미를 장식하는 올리비에 랏시(43)의 ‘양파 껍질(Onion Skin)’ 역시 영상과 사운드를 결합한 작품이다. 붉은 색과 흰 색의 선이 나타나 겹쳐지고 해체되면서 기하학적인 변형이 계속된다. 직각으로 맞붙은 두 벽에 투사되는 2차원의 영상이 3차원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올리비에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을 다른 차원의 세계로 끌고 가고 싶었다”며 “작품을 정면에 두고 6m 거리에서 응시하면 가장 완벽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을 다 둘러보고 나니 현기증이 났다. 그간 사용하지 않던 감각이 모두 되살아나서일까. 새 감각을 깨워보고 싶다면, 새로운 놀이터가 필요하다면 한번 둘러보시길. 성인 8000원.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한 티켓은 버리지 않는게 좋겠다. 전시가 끝나기 전에는 언제라도 재관람이 가능하다.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디뮤지엄ㆍ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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