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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생각지도] 대통령 호통정치 입문

중앙일보 2015.12.19 01:26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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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요즘 대통령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대통령 혼자만 국가를 걱정하고 모든 국민은 대통령을 걱정한다”는 우스개마저 나온다. 우리 대통령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다. 문제는 애국심을 실천하는 방법인데, 대통령의 애국심이 늘 호통과 위압으로만 발현되기에 걱정스러운 거다.

4반세기 다져진 신념 얼마나 단단할까
틀린 건 없어도 빠진 게 있어 위험하다


 재단법인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가 1990년 펴낸 『겨레의 지도자』에 대통령이 쓴 서문을 읽어 보니 이유를 좀 알겠다. 대통령이 정계 입문하기 전에 쓴 8쪽 짧은 글인데도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오롯이 담겼다. 글에 아버지 대통령 이름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을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란 부제가 달린 책답게 서문은 아버지 대통령의 애국 성과를 잊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으로 시작한다.

 “열매는 열매고 뿌리는 뿌리일 뿐이라고 우겨온 것이 그동안의 우리나라 풍토였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이제 우리 사회는 5000년 겨레의 한(恨)인 가난을 불과 20년이 못 되어 몰아내고 서양이 1세기나 걸쳐 이룬 발전을 불과 4반세기 만에 이뤄낸 세대의 피땀 어린 노고를 일부러 모른 척하고 애써 묻어두면서 그 열매만을 맛보려 하는 풍토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대통령의 애국심이 민주화 과정에서 저평가되고 때론 부인됐던 불편한 기억이 우리 대통령이 애국심을 표출할 때마다 트라우마처럼 깨어나는 거다. 그러고는 이렇게 나아간다. “조국이 지나온 자취, 즉 역사를 (…) 외면·왜곡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외면·왜곡·부정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는 대목이다.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도 있다. “위정자의 무능은 단순한 무능이 아니라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위정자의 오판과 무책임한 실정의 결과로 전쟁이 나서 죽도록 고생하는 사람은 바로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건 필연이다. “외부의 적 못지않게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인데 우리의 정치인들, (…) 국가 전체를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자제하고 양보하면서 사회의 기강과 질서를 지켰을까요?”

 이를 극복할 국가지도자의 자질이 나온다. “한 나라 지도자의 철학과 영도력은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미리미리 국가의 나아갈 길을 내다 볼 수 있는 선견지명과 통찰력,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결단, 때로는 비난을 감수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는 소신과 의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언행, 민족의 앞날에 희망을 갖게 하고 참다운 목표를 제시하여 그것을 향해 모두 함께 뛰어갈 수 있게 하는 능력….”

 긴 문장을 하나도 생략하지 않았건만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포용력’ 같은 덕목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대신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의 인용이 뒤를 잇는다. “만약 모세가 위원회를 통해 정치를 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끝내 홍해를 건너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아버지 대통령의 리더십을 얘기하는 거지만 오싹할 만큼 자신이 대통령이 된 오늘을 똑바로 관통하고 있다. 1990년부터 다져진 신념이 얼마나 단단할까. 거기에 틀린 얘기가 하나도 없기에 더욱 무섭다. ‘내가 옳다’는 믿음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틀린 얘기는 없지만 빠진 게 있어서 위험하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그거다. 설득 말이다. 여당만 닦달하지 말고, 국회의장에 무리를 요구하지 말고, 야당을 직접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은 결과가 있었을 터다.

 아직 안 늦었다. 남은 임기를 계속 이런 식으로 가져갈 순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하나도 가진 게 없어서 실패하는 게 아니다. 다른 건 다 갖고도 한 가지가 없어서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다. 빠진 것 한 가지를 채우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대통령이 돼야 결국 옳은 것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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