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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 vs 보호무역’ … 물고 물리는 이념 공방전

중앙선데이 2015.12.13 01:27 457호 20면 지면보기

그림 1 영국 자유당의 정치포스터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1905-6년.



그림 1은 20세기 초에 영국에서 제작된 정치포스터다. 자유무역주의와 보호무역주의 가운데 정부가 어떤 정책기조를 채택할 것인가가 선거의 핵심 쟁점이었던 시기다. 환하게 빛을 받고 있는 자유무역 가게 진열대에는 다양한 먹거리가 가득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칙칙한 빛깔의 보호주의 가게 진열대에는 먹거리의 종류와 양이 적으며, 가격이 비싸다. 진열대 유리창에는 거미줄이 가득하다. 심지어 주인이 신은 신발이 터져 발가락이 삐져나와 있다. 디테일에 신경을 참으로 많이 쓴 포스터다. 당시 정당들은 자유무역 혹은 보호무역이 유리하다는 포스터를 통해 유권자의 마음을 사려고 무진 애를 썼다.


[비주얼 경제사-35-] 무역을 둘러싼 세계화 논쟁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견해는 시장개방이 가져다주는 이점을 강조한다. 관세를 낮추면 해외에서 상품이 낮은 가격으로 들어와 소비자에게 이득이 된다. 또 다른 국가들이 시장개방을 하면 국내 생산자들이 수출을 늘리고 이윤을 확대할 수 있다. 이렇듯 자유무역은 국민이 더 큰 파이를 누리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보호무역을 옹호하는 견해는 해외 상품의 대량 유입이 국내 산업을 위축시켜 실업자를 양산하고 노동자의 소득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국제경쟁력을 갖춘 일부 산업만 시장개방의 이익을 향유할 수 있으므로 국내 산업이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할 때까지 제도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유치산업보호론을 주장한다.



 

그림 2 반(反)곡물법동맹의 시위 모습, 1840년대.



산업혁명 후 무역기조 변화 자유무역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느 나라에서건 금과 은의 획득을 늘려야 국부가 증강된다는 중상주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수출은 장려하고 수입은 억제하는 보호주의 정책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 영국이 산업혁명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19세기에 여러 국가들이 뒤이어 공업화를 진행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주장이 대두해서 보호주의를 주장하는 기존의 관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대립이 고조되면서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결국 국가별로 평화적 혹은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중에 결정이 이루어졌다.



먼저 영국을 살펴보자.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나자 곡물가격이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의회는 곡물가격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수입을 금지하는 곡물법(corn law)을 제정했다. 의회의 다수파였던 지주계층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주도한 입법이었다. 점차 성장하고 있던 자본가계층은 1838년 반(反)곡물법동맹을 결정해 대중시위를 주도하고 의회에서도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림 2는 1840년대 초 런던에서 벌어진 곡물법 반대시위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크해트에 정장을 갖춘 자본가들 옆으로 수수한 옷차림의 노동자들, 그리고 ‘샌드위치 구호판’을 몸에 찬 아이들이 보인다. 노동계층에게 곡물법은 고물가를 강요하는 악법으로 여겨졌으니 그들 가족이 시위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당연했다.



1846년 영국 정부는 결국 곡물법을 폐지하게 된다. 자유무역의 보호무역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지주계층의 번영이 경제발전에 필수라고 본 맬서스(Malthus)의 이론이 힘을 잃고, 각국이 생산비가 상대적으로 낮게 드는 상품만 제조해 자유무역을 하면 모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간다는 리카도(Ricardo)의 비교우위론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영국은 주변 국가들이 자유무역에 동조하기를 원했다. 영국의 뒤를 이어 공업화에 들어섰던 프랑스에서도 자유무역주의가 점차 힘을 얻어갔다. 그리하여 1860년 양국 간에 코브든-슈발리에 조약이라는 자유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자발적 협정의 결과로 양국의 관세는 크게 낮아졌다.



그러나 공업화가 뒤처진 국가들의 상황은 달랐다. 독일은 전근대적인 경제구조를 그대로 보유한 주변국이었다. 이 후진국의 학자들은 영국과의 자유무역이 독일의 경제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자유무역을 하면 독일은 고급 제품을 수입하고 저가품을 수출하는 경제로 굳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리스트(List)를 비롯한 이른바 역사학파 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영국과 독일이 서로 다른 경제발전 단계에 있기 때문에 자유무역이 아니라 보호무역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미국도 아직 공업화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남부와 북부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점이 미국이 해결해야 할 핵심과제였다. 식민지시대 이래 남부는 농장주들이 플랜테이션에서 흑인노예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경제였다. 대규모로 재배된 면화·담배·쌀 등을 유럽으로 수출하여 이익을 얻는 구조였다. 당연히 유럽과 자유무역을 하는 편이 유리했다. 반면에 북부에서는 상공업이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유럽국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북부는 보호무역을 통해 국내 상공업이 커갈 공간을 확보하기를 바랐다. 남북의 이해관계는 양립하기 어려웠다. 긴장관계가 점차 고조되더니 마침내 1861년 남북전쟁의 형태로 폭발했다.

그림 3 에드가 드가, 뉴올리언스의 면화사무소 1873년.



중국, 강제로 자유무역 진영에 편입4년에 걸친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북군의 승리는 보호무역이 미국 경제정책의 핵심 기조로 확정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림 3은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가 1870년대에 그린 뉴올리언스에 소재한 면화사무소의 모습이다. 면화거래상들은 탁자에 놓은 면화의 품질을 살펴보기도 하고 신문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들이 원했던 자유무역주의 시대를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남북전쟁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정부가 보호무역주의를 완강하게 고수했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스스로 무역방식을 결정했던 것은 아니다. 1839년 중국정부가 아편 거래를 중단시키자 영국은 함대를 보내 전쟁을 시작했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난징조약을 맺고 중국이 공행을 통해 유지하던 기존의 독점적 무역체제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은 5개 항구를 열고 최혜국대우 조항에 따라 자유무역적인 체제를 수용해야 했다. 하지만 영국의 기대와 달리 난징조약 이후에도 시장개방의 효과가 내륙에까지 미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은 1856년 프랑스를 끌어들여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다시 패전한 중국은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을 통해 10개 항구를 추가로 개방하고 서구인의 활동범위를 널리 인정하도록 강요당했다. 중국의 자유무역은 철저히 ‘자유롭지 못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9세기 중반은 세계화의 첫 물결이 휘몰아친 시대였다. 국가 간 무역이 늘고 노동과 자본의 이동이 많아지고 정보와 지식의 전파가 빨라졌다. 각국은 무역기조를 결정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발적으로 자유무역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독일과 미국은 보호무역주의로 기울었으며, 중국은 강제적인 방식으로 자유무역 진영에 편입되었다.



1870년대가 되자 세계경제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불황이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국제 농산물가격이 폭락했고 공업국의 불황이 주변국으로 확산하였다. 이런 위기 속에서 자유무역주의를 고수하기란 쉽지 않았다. 거의 모든 국가가 보호무역주의라는 시대적 급류에 휩쓸렸다. 자유무역주의의 첨병이었던 영국조차도 거센 논쟁에 휘말렸다. 20세기에 들어서도 보호주의의 강세는 계속되었다. 1차 세계대전, 대공황,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보호무역주의는 식민지 블록경제 체제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렇듯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대적 조류가 자유무역 쪽으로 바뀌기 시작할 때까지 보호무역주의 속에서 세계화는 긴 후퇴의 시간을 맞았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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