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극적인 삶으로 프랑스의 얼이 된 여인

중앙선데이 2015.12.13 00:42 457호 6면 지면보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음악시장계 정서지분에 있어서 프랑스의 샹송은 최강의 위상을 자랑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로 유명한 ‘마이 웨이’가 그렇듯 미국도 상당수 샹송을 직수입, 번안해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미국산 로큰롤이 글로벌 음악시장의 대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샹송은 지배력을 상실했다. 근래 프랑스 노래를 듣는 젊은이는 소수에 속한다.



그럼에도 샹송이 매혹적 이미지를 견지하는 것은 순전 에디트 피아프(1915~1963)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0년 이상 흘렀지만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음악 팬들은 연례행사처럼 지속적으로 그를 소환한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이 개봉돼 매니어를 사로잡은 것이 2007년이고, 현존 최고의 샹송 디바로 평가받는 파트리샤 카스는 2012년 에디트 피아프 리메이크 앨범을 냈다. 카스의 별명은 ‘제 2의 에디트 피아프’다.


탄생 100주년 맞은 샹송의 여왕 에디트 피아프

누구나 샹송하면 이 작은 체구의 여인을 들먹인다. 안타깝게도 음악의 측면에서 ‘프랑스는 에디트 피아프로 버틴다’는 느낌마저 든다. 자크 브렐, 샤를 아즈나부르, 세르쥬 갱스부르, 미레유 마티유 등 샹송의 명인들은 한둘이 아니지만 누구도 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샹송은 에디트 피아프’라는 등식이 굳어지고 있다. 왜일까. 우선은 ‘영혼의 가창’ 때문이다.



피아프(참새라는 뜻의 파리 속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왜소한 몸에도 엄청난 에너지의 가창력으로 마치 혼을 토해내듯 노래했다. 60년 생애 후반기 히트작이자 프랑스의 ‘마이 웨이’로 일컬어지는 명곡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들으면 누구나 뼛속까지 파고드는, 살 떨리는 전율을 경험한다. 그 혼신의 노래들을 누군가는 ‘신성한 광기(Divine madness)’라고 묘사했다. 죽기 전까지 언제나 사력을 다해 폭발적으로 노래했다.



그게 단지 노래의 테크닉 혹은 예술적 표현이 아닌 실제의 삶과 연애사가 낳은 몸부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상상과 꾸밈이 아니라 엄연한 ‘레알’에 사람들은 공감하고 감동한다. 에디프 피아프의 삶은 동료가수 이브 몽탕, 마르셀 세르당, 자크 필 그리고 26살 연하의 청년 테오 사라포 등 잇단 남자들과의 실연, 파경으로 점철됐다. 그 가운데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의 애달픈 로맨스는 앞으로도 길이 남을 대 러브로망이다. 세르당은 공연차 미국 뉴욕에 가있던 피아프가 보고 싶어 비행기로 일찍 떠났다가 그만 아조레스 해협 위에서 추락사했다. 사흘간 자기 방에 꼭 박혀 있었던 피아프는 삭발을 하고 나타나 세르당을 위해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를 불렀다.



소설로도 다 못쓸 파란만장한 삶이 따로 없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노래를 불러 끼니를 이었다는 불우한 어린 시절, 술과 마약에 찌든 삶도 드라마틱하다. 미디어가 편애하는 극적인 요소, 흥행의 소지가 풍부한 것이다. 전기 영화, 드라마, 소설이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똑같은 레퍼토리인데도 대표곡 모음 앨범을 때만 되면 출시하는 것을 비롯해 프랑스는 늘 피아프 추모 분위기다. 올해 탄생 100주년(12월 19일)을 맞아 봄에 전시회를 시작으로 대형 추모행사를 일년 내내 개최하고 있다.



에디트 피아프는 노래의 대부분을 모국어인 불어로 노래했다. 프랑스인들이 그를 ‘프랑스의 얼’로 추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묻힌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는 날마다 추모인파가 장사진을 친다. 한 여인의 음악과 인생을 통해 ‘혼의 예술’, ‘프랑스의 자긍’을 확인하기 위함이리라. ●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jjinmoo@hanmail.net사진 중앙포토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