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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복원에 딱 맞는 종이” 바티칸 박물관도 韓紙에 반했다

중앙선데이 2015.12.13 00:39 457호 16면 지면보기

한지로 복원될 교황 요한 23세의 지구본.



2일 오전 8시 30분 이탈리아 토리노 역사기록보관소. 종이와 관련된 유물 보존 및 복원처리 전문가 60여 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주 밀라노 총영사관과 이탈리아 복원재료 판매회사 CTS가 주최한 ‘한지(韓紙)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정례적인 종이 관련 세미나 예상 인원의 두 배가 넘었고 늦게 신청한 10명은 아예 참석도 못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4시 30분 마무리될 때까지 행사는 시종 뜨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이탈리아 유물 전문가들은 왜 우리 옛 종이에 이토록 관심을 보인 것일까.


한지(韓紙), 이탈리아 종이 전문가들을 홀리다

 

왼쪽부터 교황 요한 23세 재단 이사장 돈 데볼리스, 카포빌라 추기경, 장재복 밀라노 총영사.



로마시대 벽화 사본 복원에 사용 결정장재복 밀라노 총영사가 개회사를 했다. “한지는 수백 년 동안 전승된 한국 전통 기술로 제작된 종이입니다. 내구성이 강하고 투명성이 좋아 일상 생활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됐지요.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앞선 1377년 금속활자로 만들어진 『직지심경』이 한지에 인쇄됐고 그 책이 현존합니다. 이번 기회에 한지의 우수성이 유럽 복원 분야에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세미나는 오전 1·2부와 오후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에서는 한지와 직지의 재발견, 한지의 제작 방법과 사용법, 바티칸의 한지 분석 결과가 발표됐다. 2부에서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유산융합대학원 이상현 교수의 탱화 복원 사례와 한·중·일 종이 비교, 한지연구 모임인 ‘그룹 130°’ 멤버들의 한지를 사용한 문화재 복원 결과보고가 이어졌다. 점심식사 후 장소를 토리노 오리엔탈아트박물관(MAO)으로 옮겨 한지 체험 및 문답 시간을 가졌다. 전문가들은 이 교수가 한국에서 가져온 200년 된 한지를 만져보고 찢어보면서 그 품질에 놀라워 했다. 샘플 종이는 서로 얻어가겠다고 다퉜다.



행사의 코디네이터로 한지 제작방법을 발표한 문화재 복원전문가 넬라 폿지는 이번 한지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이다. LA에서 한지 부채의 매력에 푹 빠진 그녀는 전주 공예박람회와 종이 박물관까지 방문해 인간문화재들의 작품을 직접 보고 한지 전도사를 자처해 왔다. 지난 4월 열린 문화재 복원용 종이와 관련해 가장 크고 중요한 국제회의인 런던 아답트앤이볼브(Adapt & Evolve)에는 직접 분석한 자료를 들고 나가 한지의 우수성을 입증했을 정도다.



현재 베르가모에서 교황 요한 23세(제 261대 교황, 임기 1958~1963)의 애장품 지구본을 한지를 이용해 복원중이다. 교황이 되기 전 쓴 일기에서 남북한 전시 상황을 우려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교황이었기에 한지 복원 지구본은 우리뿐 아니라 교황 요한 23세 재단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이렇게 중요한 유물을 복원할 때는 재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한지를 선택한 이유는 우수한 종이라는 분석 결과 때문이다. 길고 고르게 분포된 섬유질 덕분에 내구성이 뛰어나고 장력이 좋아 편평한 문서는 물론 지구본 같은 입체적인 형태에도 잘 어울린다. 한국의 복원전문가들과 함께 연구할 기회도 많았으면 좋겠다.”



바티칸 박물관 문서복원팀장 키아라 포르나차리 다 파사노는 한술 더 떴다. 그녀는 “다섯 종류의 한지를 자체 분석한 결과 산성도가 7.3~8.6pH로 알칼리성이 높고, 흡수력·광택·질김도 등도 모두 높게 평가됐다”며 “일본의 화지(和紙)를 대체할 수 있는 종이라고 판단해 내년 초 로마 카타콤바 프레스코 벽화 사본 복원에 처음으로 한지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토리노 세미나에서 소개된 직지심경 사본과 한지의 재료로 사용되는 황촉규 뿌리, 닥나무 껍질



외국 전문가들, 자발적으로 한지 동호회 결성서양의 고문서나 사진, 양피지, 심지어 프레스코화 복원에는 한지처럼 닥종이가 사용된다. 이 종이는 유럽에서 문서 보존 및 복원·벽지·포장·생활용품 등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호칭은 안타깝게도 ‘쌀종이’ 또는 ‘일본 종이’로 통칭된다.



문화유산이 많은 이탈리아가 고문서 및 문화재 복원에 거의 100% 일본 화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66년 피렌체 대홍수 이후다. 그림 및 문서 복구에 나선 전문가들이 “화지가 최상”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들은 “화지가 얇고 강하며 친환경적이기 때문”이라고 자랑한다. 실제로 문서 복원용으로는 일본 화지가, 벽화 복원용으로는 태국산 닥나무 원료를 수입해 독일 등에서 제작한 기계지가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화지 일색인 유럽의 문화재 복원 및 보존 분야에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한 곳이 주 밀라노 총영사관이다. 장인이 수작업으로 뜬 수록지(手?紙·손으로 만든 종이)의 수출 판로만 확보한다면 시장 수요를 창출해 장인의 명맥을 유지하고, 전통 기술을 보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외국 문화재와 우리 문화 전통 기술의 접목으로 지구촌 문화보호에 앞장선다는 이미지가 공공 외교의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눈을 뜬 것이다.



전문가들이 한지를 주문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지가 고문서 복원에 적합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고경석 영사를 비롯한 주 밀라노 총영사관은 2013년부터 한지 알리기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의 한지 제작 시범을 시작으로 이듬해 6월엔 주요 기관의 수석급 전문가를 불러놓고 한지 워크숍도 개최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워크숍에 참석한 외국 전문가 12인이 자발적으로 ‘그룹 130°(Group 130°)’이라는 동호회를 결성했다는 점이다. 2014년이 한·이탈리아 수교 130주년이라는 점에 착안한 이름이다. 넬라 폿지도 여기 멤버다. 앤디 워홀의 ‘블랙 마릴린’, 영국 지리학 연구소의 ‘현대지도’ 등 15~20세기의 각종 문화재 복원에 한지를 활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24개의 작품을 한지로 복원했다. 한지에 관심을 갖게 된 영국·네덜란드의 전문가들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멘토 중에는 미국 필라델피아 CCAHA 선임 종이복원가 송민아씨도 있다.



이들은 한지 미술전(2014년 9월 토리노), 한지 심포지엄(2014년 10월 로마), 한지 전시관(2014년 12월 밀라노)을 열었고 올 2월에는 밀라노 상공회의소 산하 산업시험센터에 화지와의 비교 테스트를 의뢰했다. 분석 결과 한지의 내구성(8000년)이 화지(3400년)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에 영사관측은 주이탈리아 대사관, 주바티칸 대사관 등과 함께 로마 등 각 도시를 순회하며 전문가들에게 분석 결과를 들이밀었다. 또 예술 작품의 재료로도 사용할 수 있음을 일반인에게 알리기 위해 루이자 발리코, 루카 브라이 등 유명 예술가를 초청해 한지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주 밀라노 총영사관은 한지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국내 수록지 수출업체인 FIDES와 계약을 맺고, 기계지(개량 한지) 생산과 관련해서는 전주 한지산업지원센터와 전략적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또 이탈리아 본사를 비롯한 스위스·프랑스·스페인 등 외국 6곳에 지사를 두고 문화재용 종이를 공급하는 회사 CTS를 접촉했다. 한지의 품질 및 가격 분석 결과 시장성이 있다고 본 CTS측은 2015년도부터 판매 카탈로그에 모든 종류의 한지를 포함시켰다.

한지를 이용해 복원한 포스터의 복원 전(왼쪽)과 후



“질 관리가 관건 … 원산지 증명제 도입돼야”한지의 우수성이 수치로 확인되면서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의 복원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가장 긴장한 것은 60년 가까이 복원용 수록지를 만들어 수출하고 있는 일본 종이제조업자들이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한지를 수입해 유럽 전역에 공급하고 있는 CTS사의 제르마노 필로토는 “CTS는 복원가들에게 보증서나 다름없다. 우리가 제공하는 재료는 검증된 것이라 생각해 복원가들이 재검사를 하지 않고 바로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화학 약품을 첨가한 종이가 수록지로 유입되고 그것이 발견된다면 한지는 유럽 복원업계에서 금세 신뢰를 잃을 것이다. 50년 이상 사용해온 일본 종이를 신뢰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한지로 갈아타게 하려면 질 좋은 종이를 계속 공급해 신뢰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재삼 강조했다.



한지가 가격 경쟁력에서 월등히 우월함에도 국내의 한지 산업 자체가 매우 낙후해서 현재로서는 문화재 복원용지 및 일부 공예 제품 용도 한지의 소량 수출만이 가능하다. 기계지의 경우 문화유산이 산재한 유럽에서 충분히 시장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한국 내 수요가 별로 없어 생산이 거의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과 정부가 한지 제작에 관심을 갖고 장인의 제작환경을 개선해 이번 분석 결과와 같은 고품질의 한지를 꾸준히 공급한다면 유럽 문화계에 또 다른 한류를 일으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하다.



장재복 총영사는 “화지가 독점하고 있는 복원시장에 한지가 진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며 “분석 결과에 충격받은 일본인들이 분발하리라 예상되지만 한국산 닥나무라는 원료 자체가 한지의 우수성을 만들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국내에서 지속적으로 우수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원산지 증명 제도가 도입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토리노(이탈리아) 글 김성희 중앙SUNDAY S매거진 유럽통신원 sungheegioielli@gmail.com사진 교황 요환 23세 재단·주 밀라노 총영사관·페데리카 델리아·로베르토 코르테제 토리노 역사기록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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