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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자’ (1970)

중앙선데이 2015.12.13 00:36 457호 24면 지면보기

1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성적으로 군림하려는 권력이?파시스트의 기본적인 욕망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는 무솔리니 시대에 파시스트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관객들은 마르첼로가 어째서 파시스트가 되었는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다. 한 파시스트가 마르첼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파시스트가 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두려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돈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둘 다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자네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해봐야겠다.”



‘순응자’는 주인공이 목적을 확인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정상적인 남자’가 되려는 것이다.



 

2 결혼을 통해 정상적인 남자가 되길 원하는 마르첼로와 그의 약혼녀.



정상성을 향한 투쟁과 방황정상적인 남자가 되기 위해 그는 결혼을 준비한다. 어린 시절 동성애자인 운전기사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다고 토로하면서, 부잣집 딸과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고 고해성사를 한다. 하지만 마르첼로가 말하는 정상성은 분명하지 않다. 과거의 성적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일 수도 있고, 결혼을 통해 가부장의 지위를 얻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붕괴되어버린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는 과거에 파시스트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살육과 우울’이라는 과거 행적에 대한 반성적인 시를 읊으며 우울한 요양 생활을 하고 있다. 마르첼로는 아버지에게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패기 넘치던 모습을 주문하지만 아버지는 움츠러들 뿐이다. 저택에 홀로 사는 어머니는 운전사와 내연 관계를 맺으며 시간을 보낸다. 마르첼로는 그를 따라온 비밀경찰에게 말한다. “이 집은 정상이 아니야.”



 

3 콰트리 교수 암살 현장에서 만난 마르첼로와 안나.



그렇다면 무엇이 정상적인 것일까. 마르첼로의 방황은 파리로 이어진다. 그가 파리에 온 것은 신혼여행이라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도 파리에서 반파시스트 운동을 펼치는 이탈리아 교수 콰드리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콰드리는 마르첼로의 대학 은사이기도 하다. 마르첼로는 콰드리와 대화를 나누고, 그의 부인 안나를 만나면서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다.



파시즘은 우월주의의 사고방식이다. 인물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베로(진짜) 파시스트”라는 말은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정의를 통해 규정된다. 왜곡된 초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파시즘의 사고는 우월주의를 내세워 인종차별을 양산하고, 폭력을 일상화한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성적으로 군림하려는 권력이 파시스트의 기본 욕망이라는 것을 곳곳에서 시각화하여 보여준다. 마르첼로가 찾아가는 파시스트들의 본거지마다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4 마르첼로는 어린 시절의 동성애에 대한 억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다름과 우월과 정상에 관한 탐구하지만 콰드리 교수의 집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그들이 지닌 열정은 지배하려는 열정이 아니라 변화시키려는 열정이며, 군림하려 하지 않고 대화를 중요시한다. 콰드리는 대학 시절에 주인공이 쓰려 했던 논문을 거론하면서 플라톤의 동굴 우화를 화두로 삼는다. 그림자를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지금 이탈리아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동굴에 갇힌 사람들은 바깥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을 진짜라고 여긴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콰드리와의 대화가 논리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라면, 안나는 마르첼로에게 감정의 충격을 던지는 인물이다.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마르첼로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이 ‘정상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는 안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 콰드리와 함께 떠나지 말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나 안나는 끝내 교수를 따라가는 것을 선택하고, 준비된 암살단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를 지켜보던 마르첼로는 참혹한 파시즘의 현재를 외면해버린다.



1968년 파리와 유럽을 휩쓴 ‘68혁명’을 바라보면서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긴 ‘순응자’는 파시스트로 대변되는 마르첼로의 ‘정상’이 허구임을 폭로한다. 그가 말하는 정상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약한 고리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사람들을 향해 마르첼로는 자신을 파시스트로 이끈 이를 고발한다.



그러나 이 순응자는 끝내 알지 못한다. 고발하는 손가락이 언젠가 자신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정상을 추구하는 순응이란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보다 더 강력한 나약함의 상징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더 강한 지배자 찾는 심리상태?스스로 강해져야 벗어날 수 있다



 

동성애와 살인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마르첼로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원한다. 오로지 정상적이고 싶은 마음으로 중산층 여자와 결혼을 결심하고 파시스트가 된다. 그러던 중 신혼여행을 떠난 파리에서 반파시스트 지도자이자 옛 은사인 콰트리를 암살하라는 비밀경찰의 지령을 받는다.



매일 마주치는 동급생 중에 당신을 함부로 때리고 돈까지 갈취하는 힘센 놈이 있다고 치자. 이 곤란한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학교 바깥, 유흥가를 장악한 폭력조직의 일원이 되는 건 어떨까. 또래와는 비교가 안 되는 더 강하고 힘이 센 폭력배의 부하가 되면 당신을 노예 부리듯 괴롭히던 놈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전국시대 전략가들의 책략을 모아놓은 『전국책』(戰國策)에는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고사가 나온다. 등 뒤에 호랑이를 두면 여우도 수많은 짐승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뜻이다.



 



권위적 아버지 탓 파시즘에 가담부유한 집 도련님이었지만 여성적이면서 소심했던 아이 마르첼로는 유년 시절 내내 동네 아이들의 놀림거리였다. 우르르 몰려든 아이들은 남자가 맞는지 확인한다며 거리에서 속옷을 벗긴다. 심지어 남자로부터 은근한 추파를 받기도 한다. 아이는 자신이 당한 고초를 부모에게 말하지 못할 정도로 여렸다. 하긴 매우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였으니, 또래들과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가는 위로는커녕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이 다소곳한 도련님 마르첼로 클레리치는 장차 어떻게 자랄까.



놀랍게도 마르첼로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비밀경찰이 된다. 비극의 기원은 어쩌면 마르첼로의 아버지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남성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아들의 선택지는 둘뿐이다.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내면을 구축하는 길, 아니면 아버지에 저항하고 끝내는 압도할 수 있는 내면을 갖추는 길. 불행히도 나약한 내면을 지녔던 마르첼로는 굴종의 길로 들어선다. 파시즘에 가담하고 비밀경찰이 되는 이유다. 무솔리니의 정권이 등 뒤에 선 호랑이였던 셈이다.



마르첼로는 자신의 강한 모습, 정확히는 ‘강한 척할 수 있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런데 강력한 힘의 상징이었던 아버지는 이제 정신병원에 갇힌 노인 신세가 되었다. 부자의 상봉 장면은, ‘순응자’의 큰 주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빛나는 지름길이다. 마르첼로는 먼발치에서 아버지를 바라보고, 그 순간 감독은 아버지의 독백을 영상에 담는다. “국가 자체가 개인의 관념에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 개인이 국가라는 관념 내에서 자기 자신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파시스트 정권 아래에서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게 된다는 일갈이다. 당연하다. 강압적인 독재는 인간을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노예로 만들어버리니까.



결혼식을 올린 마르첼로는 아내와 함께 파리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진짜 목적은 대학 시절 마르첼로의 교수였지만 지금은 반파시즘 무리의 지도자가 된 콰드리 교수의 암살이었다. 육체적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정신적 아버지는 파리로 망명한 셈이다. 허나 파리의 반파시즘 진영은 이미 마르첼로의 존재를 눈치챘고, 콰드리 교수는 한때 제자였던 그를 회유하려 한다. 반파시즘과 관련된 논문을 왜 마치지 못했는지 묻자 마르첼로는 과거 지도교수에게 투정하듯 화를 낸다. “교수님이 떠났잖아요. 그렇게 전 파시스트가 되었어요!”

5 주인공 마르첼로[사진 마티]



스스로 아버지가 돼야 사라지는 불안냉혈한 역을 떠맡았지만 강인한 의지도 없고 주체적인 판단도 못하는 마르첼로의 나약함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정권에 빌붙어 비밀경찰이 된 건 순전히 아버지 탓이라는 거다. 육신의 아버지든 정신적 아버지든 간에. 그래서 종국에 훨씬 더 힘이 센 아버지, 무솔리니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타인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만 가능한 행동이라면, 그 어떤 결정도 제스처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인정만이 절대적이었다면, 그 인정은 결국 그럴싸한 연기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영원불사할 것 같던 무솔리니는 실각하고 처형당한다. 시위대가 떠난 밤거리에 홀로 남은 마르첼로의 형상은 아버지를 잃은 황망함에 몸을 떠는 영락없는 꼬마아이의 모습이다. 마르첼로는 다시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까. 육신의 아버지도, 정신의 아버지도, 정치의 아버지도 떠난 자리, 마르첼로는 또 어떤 아버지에게 기대게 될까. 시위 현장, 흔들리는 모닥불에 따라 점멸하는 가엾은 우리의 마르첼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스스로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불안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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