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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로 즐기는 충청도 양반집 국수맛

중앙선데이 2015.12.13 00:30 457호 28면 지면보기

도마국수(멸치국수). 설명대로 따라서 하면 아주 맛있는 멸치 국수의 3단 변주곡을 즐길 수 있다. 맛깔스러운 돼지고기 수육이 올려져 있는 그릇이 특이하게도 ‘바라’라는 전통 타악기다.



“먼저 아무 양념도 넣지 말고 그냥 국물 맛부터 보세요. 그리고 면을 어느 정도 드신 다음에 여러 고명을 같이 넣고 고추 다진 것을 곁들여 다시 드세요. 그렇게 해서 면을 다 드신 다음에는 국물에 밥을 좀 말아서 파 양념장을 넣어서 드셔보세요. 저희 국수는 이렇게 드셔야 가장 맛있습니다.”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69- 광화문 ‘김씨도마’의 멸치국수

처음 찾아간 식당, 고작 멸치 국수 한 그릇을 시켜서 먹으려는데 이렇게 자세한 ‘지시’를 받았다. 자신이 만드는 음식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얘기다. 귀찮다는 느낌보다 기대감이 먼저 들었다. 아무렇게나 섞어 넣으려던 양념장 그릇을 밀어 놨다.



국물 맛을 먼저 봤다. 첫 맛에서 멸치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아 약간 멈칫하는데 곧 뒤따라 오는 풍부한 감칠맛이 그 거부감을 온전히 덮어버렸다. 옛날 스타일이지만 깔끔하고 달콤한 맛까지 느껴지는 훌륭한 국물이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게 적당한 크기로 썰어 넣은 칼국수 면은 부드럽게 술 넘어간다. 콩가루를 섞어 반죽해서인지 구수하고 달달한 맛이 난다.



두 번째 ‘지시 사항’을 실행에 옮겼다. 호박·표고·버섯·김치를 참기름에 볶은 것, 그리고 쇠고기 다진 것 등의 고명을 한꺼번에 국물에 넣고 고추 다진 양념을 조금 풀었다. 국물 맛이 훨씬 풍부해지면서 다양한 맛이 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느낌이다. 덕분에 면이 금방 입안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 밥을 국물에 말고 파 양념장을 섞었다. 짭조름하고 향긋한 파 양념장이 깊고 풍부한 맛의 국물과 만나면서 밥 도둑으로 변했다. 이미 배는 부른데 숟가락을 멈출 수 없다.

▶김씨도마 :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74 벽산 광화문시대 빌딩 지하 1층. 전화 02-738-9288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쉰다. 도마국수(멸치국수), 비빔국수 8000원. 돼지고기 도마수육 3만원. 특이하게도 왕대포가 아직 있다. 진천 막걸리 왕대포 한잔 3500원



대단한 내공이다. 그저 흔한 멸치 국수 한 그릇을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맛의 변주곡’을 연출해내는 욕심 많은 분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안 그래도 들어오면서 보니 인테리어가 범상치 않았다. 광화문 부근에 있는 ‘김씨도마’라는 곳이다.



독특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맛깔스러운 한식을 하는 식당 중에는 예부터 양반 가문 집안에서 내려오던 음식을 바탕으로 하는 곳들이 많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충청도 음성의 종갓집 출신인 김민용 대표(여)가 어렸을 때 부엌 심부름부터 하면서 하나씩 배워왔던 집안 음식으로 문을 연 곳이다. 살림만 하던 가정주부였는데 대기업을 다니던 남편 강효석씨가 IMF 경제 위기 때 조기 퇴직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3년에 개업했다.



부인이 음식을 하고 남편이 운영을 거드는 방식으로 시작을 했는데 이때부터 남편 강씨의 숨겨졌던 예술가로서의 끼가 발산이 되기 시작했다. 식당의 모든 인테리어를 자신이 직접 맡아서 한 것은 물론이고 네팔의 야크 털로 만든 니트를 이용한 디자인 등 설치 예술가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히말라야산 중턱에서의 퍼포먼스를 포함해 전시회도 벌써 세 번이나 했다. 식당 위치가 시내 중심 번화가 빌딩인데도 그 안에 들어서면 마치 어느 전원 도시에 있는 예술가의 개인 공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릇들도 독특했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 수육은 놋으로 만든 ‘바라(전통 금속 타악기)’를 뒤집어서 그 위에 얹어 내어온다. 비빔국수를 담는 그릇은 네팔에서 의식에 사용하는 ‘싱잉볼(Singing Bowl)’이다. 보기에도 멋스럽고 재미있다. 음식을 차갑게 내놓을 때 기능적으로도 잘 맞는다. 모두 강씨의 아이디어다.



이곳 음식들은 모두 김 대표가 집에서 배운 그대로 만드는 것들이다. 국수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자신 있었다. 아버지가 국수를 좋아하셔서 집에서 하루 한 끼는 꼭 국수를 준비할 정도였다. 덕분에 그 집안 여자들은 모두 국수 만드는 내공이 깊어졌다. 멸치 국수를 3단계로 나눠서 맛을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자신들이 집에서 먹던 방법 그대로였다. 그렇게 먹을 때 가장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이렇게 먹는 방법까지 포함해 집에서 배웠던 맛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음식점들이 생겨나고 화려한 요리 기술로 무장한 스타 셰프들이 등장하는 시대지만, 이렇게 옛날부터 내려오는 집안의 음식을 꿋꿋이 지켜나가는 분들이 있다. 덕분에 그 소중한 맛을 잘 즐길 수 있어서 고맙다. 이런 분들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그만큼 더 많은 우리의 맛을 잘 지킬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주영욱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대표. yeongjy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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