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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푸어’ 탈출법?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노마드 정신!

중앙선데이 2015.12.13 00:24 457호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또다시 연말이다. 이때면 사람들은 모두 시간철학자가 된다. 세월이 쏜살같다느니,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다느니 하면서. 한데, 그 시간철학의 기저에는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이미 채워진 것들을 지속하고자 하는 집착이 깔려 있다. 채움과 지속, 갈망과 집착,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니 인간의 욕망과 시간의 흐름은 늘 엇박자가 난다. 결론은 그래서 삶은 허무하다는 것.


[길 위의 인문학] -끝- 누구나 ‘시간 철학자’ 되는 연말

과연 그럴까? 그럴 수도 있다. 무엇보다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완화하는 장치가 ‘허무’가 아닐까? 허무는 옷을 바꿔입은 죽음인 셈이다.”(‘어떻게 허무와 함께 살 것인가?’-북드라망 블로그) 연말연시는 이 허무를 연습하는 시기다. 하지만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허무하다는 건 반쪽의 진실에 불과하다. 죽음이 있어야 삶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죽음이야말로 생이 마련한 선물이 아닌가. 이런 역설에는 허무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오히려 죽음이야말로 구원이자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동요한다. 허무와 구원 ‘사이’에서. 결국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아니, 그 이전에 시간에 대하여.



 



자본주의가 가져온 시공간의 균질화먼저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지 않는다. 굳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간은 무성적인 단위가 아니다. 공간과 함께, 그 공간을 채우는 존재와 함께 흐른다. 하여, 동물과 식물, 인간의 시간은 각기 다르다. 또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위치와 질량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예컨대, 봄·여름의 시간과 가을·겨울의 시간성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발산이 주관하기 때문에 속도가 빠르다. 몸과 마음 또한 바쁘게 움직인다. 가을이 오면 발산은 수렴으로 방향을 바꾼다. 당연히 속도가 잦아든다. 만물이 제모습을 감추는 겨울은 시간 또한 한없이 더디게 흐른다. 이런 이치에 따라 추론해본다면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속도’를 지니고 태어난다. 시간의 응축과 펼쳐짐, 그것이 명리학에서 말하는 운명이다. 운명이란 결국 신체에 내재된 ‘리듬과 강밀도’에 다름아니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건 이 ‘시간성’들의 마주침이다. ‘시절인연’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이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시공간을 폭력적으로 균질화했다. 기차를 통해 공간을 균질화하고 시계를 통해 전 세계의 역법을 통일해버린 것이다. 시간이 시계라는 공간적 구조물 안에 갇힘으로써, 달리 말해 시간이 공간에 포획됨으로써 시간은 철저히 양화되었다. 24시간, 60분, 60초 혹은 1주일, 30일, 열두 달, 365일 등 잘게 쪼개진 구획 안에 가두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사계절, 12월령, 24절기, 72절후, 오운육기 등 ‘천지인’이 어우러진 시공의 차서(次序)는 증발해버렸다. 시간이 양적으로 분할되면 사람들의 행동도 그렇게 된다. 척도는 노동과 화폐, 원리는 다다익선. 그럴 때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흐른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주는 상념이 바로 덧없음이다. 실적이 괜찮으면 그나마 보람을 느낄 테지만 실적이 없을 때의 일년은 허송세월에 불과하다. 지금 같은 저성장 시대엔 대개가 다 후자일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실적을 쌓았다 한들 덜 허무할까. 시간은 직선 위에 서있고, 나는 그 레일을 열심히 뛰는 것 말곤 달리 길이 없는데. 청년기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뭔가를 이루고, 남보다 앞서가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니까. 하지만 중년 이후엔 다르다. 그 레일 위에서 얻는 성취와 만족은 이제 지루하다. 아무런 차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이 없는 반복. 가장 생명에 반하는 짓이다. 거기에 갇히면 인생은 말할 수 없이 허무해진다. 자기속도를 직선의 레이스에 다 빼앗긴 뒤의 상실감이랄까. 그 결과 현대인은 대부분 ‘타임푸어’가 되었다. 부란 무엇인가? 자기가 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양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면 그 사람은 시간의 노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한들, 늘 바쁘고 늘 허무한 ‘시간거지’, 그게 ‘타임푸어’다.



 



우리 일상은 어디론가 흘러갈 뿐 또 하나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잠시도 동일하지 않은 찰나찰나의 명멸들, 그것이 시간이다. 연초와 비교하면 이미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 그것이 덧없음이자 무상함이다. 그래서 허무하다고? 그건 참 이상한 논법이다. 무상이 왜 허무를 낳는가? 무상하지 않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좋았던 순간이 지속되면 곧바로 권태에 빠져 버린다. 언급했듯이 생명은 반복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괴롭고 참혹한 순간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순식간에 흩어지듯 불행 또한 금세 망각의 강을 건너 버린다.



보르헤스의 작품에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은 하루를 기억하는 데 꼭 하루가 걸린다. 결국 그는 기억에 붙들려 오늘을 살아낼 수가 없다. 니체가 망각이야말로 삶의 능력이라고 예찬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리라. 지진이나 테러, 그 어떤 끔찍한 재앙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무상과 망각은 곧바로 일상을 복원시켜준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다만 어디론가 흘러가는 일상. 그것이 곧 생명과 우주의 이치다.



인생 또한 사계절이다. 청춘이 봄이라면 장년이 여름이고, 갱년기 이후엔 가을, 노년은 겨울이다. 사계절의 스텝이 다르듯, 인생 또한 시기마다 다른 스텝을 밟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엇박자가 난다. 가을에 봄을 그리워하고, 봄에 벌써 겨울을 걱정하는 식으로. 중년이 청춘을 모방하느라 바쁘고, 청년들이 노후대책에 골몰하는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스텝이 꼬이면, 내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날 끌고 가버린다. 세월의 덧없음, 인생의 허무함이라는 통념이 생겨나는 온상도 바로 여기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면, 공동체(감이당과 남산강학원) 활동을 하기 전엔 시간은 그저 나이를 측정하는 것에 불과했다. 마흔 전이니까 봄·여름에 해당하는 시간이었고, 그땐 시간은 속절없이 빠르다고만 생각했다. 뭔가 이루기도 전에 나이만 먹는다는 통념에 지배당한 것이다. 하지만 40대 이후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아주 특이한 경험을 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 말이다. 연말이 되면 연초가 아득하기만 하다. 왜 그럴까? 다름 아닌 차이와 서사 때문이다. 공동체에선 균질적인 시간이란 작동하지 않는다. ‘노동과 화폐’가 아닌 ‘공부와 신체’라는 척도는 입체적이고 다중적이다. 그래서 매일이 여삼추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가 생겨나고 소멸한다. 수많은 인연이 오고 간다. 공동체란 사람을 만나는 곳이면서 동시에 헤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적으로 교차한다. 여기에는 주체도 목적도 없다. 오직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모든 존재는 제 나름의 속도를 지니고 있음을. 인연이란 속도들의 마주침이라는 것을. 수많은 시공의 어울림과 맞섬, 그것이 공동체고 삶이다. 그러니 일년을 되돌아보면 너무 많은 서사가 넘실거려서 되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또 하나. 해가 바뀐다는 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2015년(을미년)의 운(運)과 2016년(병신년)의 운은 질적으로 판이하다. 전혀 다른 리듬과 속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난해에 이룬 것들은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공부도 활동도 관계도.



 



리듬을 타고 강밀도 조절하는 것이 속도그러니 매번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시공이 제모습을 바꾸었으니 나도 거기에 맞춰 다시 리듬을 조율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속도의 노마디즘’이다. 유목민은 초원의 풀을 따라 이동한다. 그때 중요한 것은 리듬과 강밀도다. 사계절의 리듬은 동일하지만 강밀도는 매년 달라진다. 리듬을 타고 강밀도를 조율하는 것이 바로 속도다. 이 속도를 창안하는 것이 노마디즘이다. 인생 또한 다를 바 없다. 청춘에서 노년까지 매시기에 맞게 자기속도를 연출하려면 지나간 것들을 지나가게 해야 한다. 죽음 또한 그 무상한 흐름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럴 때 죽음은 더 이상 허무가 아니다. 생의 또 다른 변이이자 도약이다. 그 무상성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다면 생과 사의 경계 또한 가뿐히 넘을 수 있지 않을까. 무상함이 허무가 아니라 구원이 되는 이유다.



“어쨌든 시간은 미끄러져 내려가니까요. 그건 완만한 경사 같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난 그렇게 살아가도록 나 자신을 그냥 놓아둬요. 눈이 멀지 않았을 땐 늘 여러 가지 것들로 내 시간을 채워야 했지요. 지금은 그러지 않아요. 나 자신을 그냥 놓아둔답니다.”20세기의 거장 보르헤스가 노년에 한 말이다. 그는 소망한다. 몸도 마음도 온전히 소멸되기를, 영원히 망각되기를. 이것은 허무도 두려움도 아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봄·여름·가을을 다 거친 자만이, 또 갈망과 집착을 벗어나 ‘지금, 여기’의 찰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자만이 그런 ‘장엄한 소멸’을 욕망할 수 있는 법이므로.



보르헤스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선의 레이스를 달리다 허무에 빠지는 ‘타임푸어’의 길은 이제 그만. 물론 무상성의 바다를 기꺼이 유영하면서 자기만의 속도를 창안하는 노마드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고미숙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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