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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불가근 불가원’… 구웨이쥔, 뼛속까지 외교관

중앙선데이 2015.12.13 00:24 457호 29면 지면보기

2014년 9월 27일, 뉴욕에서 열린 옌유윈의 109세 생일파티. 구웨이쥔과 세 명의 부인 사이에 태어난 자손들뿐 아니라 옌유윈과 양광성의 후예들도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 김명호]



두 번째 주미대사 시절,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은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황후이란도 현실을 인정했다. “구웨이쥔은 날이 갈수록 변해갔다. 한 집에 살며 같은 밥만 먹을 뿐, 의견도 나누지 않았다. 각자 따로 놀았다. 그러나 같이 사는 원인은 친정 엄마 때문이었다. 평소 엄마는 구웨이쥔을 극진히 챙겼다. 구웨이쥔도 사위 노릇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노년의 장모를 워싱턴으로 모셔다 함께 살았다. 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렀다. 나는 감격했다. 1956년 편안한 마음으로 37년에 걸친 부부관계를 청산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6-

홀가분해진 구웨이쥔은 대사직에서 물러났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절세의 외교관을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에 임명했다. 임지인 헤이그에 부임한 구웨이쥔은 동거 중이던 옌유윈(嚴幼韻·엄유운)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마지막 직함은 국제사법재판소 부소장이었다. 은퇴 후에는 뉴욕에 정착했다.



중국의 20세기는 격변의 연속이었다. 난징의 국민정부가 베이징의 북양군벌을 제압했지만, 중공에게 대륙을 내줬다. 그 와중에서 구웨이쥔의 처신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두 차례 실패자 편에 섰고, 두 번 수배자 신세로 전락했지만 승리자들은 그 때마다 관용을 베풀었다. 1926년, 국민정부의 북벌군이 중국의 배꼽 우창(武昌)을 점령했다. 베이징 정부의 국무총리였던 구웨이쥔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하지만 국민정부 2인자 장쉐량(張學良·장학량)덕에 수배령이 풀렸다.

헤이그 시절의 구웨이쥔과 옌유윈(오른쪽). [사진 김명호]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구웨이쥔은 국제연맹 리튼 조사단의 일원으로 일본의 침략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국·공 양당이 정권을 놓고 온갖 연출을 할 때 구웨이쥔은 미국의 조야에 국민당 지원을 호소하고 다녔다. 승리자 중공은 해외 사절 중에서 구웨이쥔에게만 체포령을 내렸지만, 형식에 불과했다. 1972년 9월, 마오쩌둥은 유엔 대표단으로 떠나는 장한즈(張含之·장함지)에게 당부했다. “미국에 가면 구웨이쥔을 만나라. 내 안부 전하고, 적당한 시기에 대륙을 방문하라고 일러라.”



구웨이쥔이 국·공 양당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기까지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50여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일관된 원칙을 견지했다. 상부의 지시를 받거나, 건의를 할 때마다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을지를 스스로 고민했다. 나는 평생 당파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권력투쟁에 말려 들다 보면 국가의 이익을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외교 문제를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정치적 득실이나 야심을 실현시키려 한다면, 담판은 파열되기 마련이다. 정치와 외교는 구분돼야 한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은 외교관 자격이 없다. 정치가가 외교에 나서는 것도 위험하다.”



구웨이쥔은 일반 중국인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학설이나 주의(主義)를 존중하지 않았다. “미국의 민주당이나 공화당은 명확한 사상체계가 없다. 그러다 보니 양당간에 소통이 가능하다. 중국의 정당은 노동자나 농민·상인 등 각 분야에서 기반도 약하고 이익도 대변하지 못하면서 학설과 주의를 너무 중요시 여긴다. 정당들끼리 티격태격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간단하다. 국가를 이끌고 나갈 고민의 충돌이 아니라 개인의 지위 때문이다. 정견의 차이는 국내 문제에 한정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해외에서 정부의 체면을 유지하기 힘들다. 정확하고 모든 것을 초월한 정치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념과 학설이 비슷하다. 왜 싸우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구웨이쥔은 평생 독자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정파에 소속된 적이 없다 보니, 정치투쟁이나 군사문제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정치적인 두뇌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즐거웠다. 국가 이익과 민족의 존엄을 위해 외교문제를 처리했다. 중국은 재미있는 나라다. 정부의 명령은 통일된 적이 없고, 군벌들은 분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럴 때 일수록 무지한 통치자가 편했다. 뇌물로 총통이 된 차오쿤(曹?·조곤)도 외교문제는 내게 일임했다.”



구웨이쥔은 장제스와도 별 인연이 없었다. 장제스의 권유로 국민당에 입당했고, 중앙위원에 피선 됐지만 이름뿐이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공산당과도 국제회의에 동행했던 몇 명과 간단한 안부를 주고 받는 게 고작이었다.



구웨이쥔은 1985년 11월, 옌유윈의 침실에 붙어 있는 욕조에서 세상을 떠났다. 황후이란은 1993년 겨울, 100번째 생일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구웨이쥔의 부인이었다는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남편은 중국의 1세대 외교관으로 손색이 없었다. 오랜 세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정이 더 깊었다.”



옌유윈은 지금도 건재하다. 2014년 9월, 109번째 생일날 장수 비결을 털어놨다. “평생 보약 먹은 적이 없고, 운동도 하지 않았다. 지난 일은 금새 까먹고, 오늘 일만 생각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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