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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 못 한 군주의 비극

중앙선데이 2015.12.13 00:03 457호 1면 지면보기

광해군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큰 사진은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대동법 시행비. 작은 사진은 대동법 시행세칙을 담은 호서(충청) 대동사목. 사진가 권태균



 


-22-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② 광해군

 



 



 



 



 



 



 



 



 



【총평】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되어 해안 지방의 백성을 괴롭혔다. 이에 정부는 수군을 강화하고, 화약 무기를 장착한 성능이 뛰어난 전함을 개발하는 한편, 왜구의 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일본의 막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세종 때 이종무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했다. 그 후 대마도의 도주가 왜구를 통제하겠다며 조선과의 무역을 요청해 오자, 정부는 남해안의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항하여 무역을 허용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왜인의 무역 요구는 늘어났지만, 조선 정부의 통제는 강해졌다. 3포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은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고 3포 왜란과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이에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는 왜인들이 3포 왜란을 일으키자 3포를 폐쇄했다. 또한, 을묘왜변을 계기로 비변사를 상설화하여 대책을 세웠다. 비변사는 본래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임시 기구였으나 임진왜란 거치면서 외교, 재정, 사회 전반은 물론 고위 관리의 인사 문제까지 관할하게 된다. 이에 의정부와 6조는 비변사에서 결정된 내용을 집행하는 기구로 위상이 낮아지게 되었다.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 이후 수십 개의 소국이 난립하는 혼란이 지속(전국 시대)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 시대를 통일했다. 그는 지방 영주(다이묘)와 신흥 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이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 침략을 결정했다. 일본은 조선에 명을 정벌하러 가는 데 필요한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거절하자 일본은 군대 편성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은 조선의 산천과 지리 정보를 수집하고 조총을 개량하는 등 준비를 마친 후에 약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1592).



일본은 조선에서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를 데려가 문화 발전의 토대로 삼았는데, 특히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를 받아들여 크게 발전시켰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형세도 크게 변화시켰다. 명과 조선, 일본이 전쟁을 벌이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했다(1616). 쇠약해진 명은 결국 여진족에 의해 멸망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명이 멸망한 후에도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명을 숭상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왜란이 끝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북인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전쟁을 뒷수습하고,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우선, 농지 개간을 장려하고 토지와 호적 조사를 시행했다. 또 현물로 내던 공납을 쌀로 내게 하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그리고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며, 불타 버린 사고를 다시 건립했다.



지방 특산물을 현물로 냈던 공납은 당시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었다. 더구나 방납의 폐단이 나타나면서 농민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광해군 때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 시행되었고, 점차 확대되어 숙종 때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었다. 대동법 시행으로 토산물 대신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 무명, 동전 등을 낼 수 있게 되자, 토지가 없는 농민은 부담이 줄어 크게 환영했다. 그러나 기존의 방납 관련자들과 지주층이 강하게 반대하여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 많은 기간이 소요되었다.



대동법 실시로 선혜청에서 공인이라는 특허 상인에게 비용을 미리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을 독점적으로 조달하도록 하였다. 이에 공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으며, 공인의 주문에 따라 생산하는 수공업도 발달했다. 대동법 시행 이후에도 진상, 별공 등 현물 납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농민의 부담이 이전보다 줄어들었으며 국가 재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명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후금을 세운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명을 공격했다. 이에 명이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조선은 명의 요구를 받아들여 1만 3천 명의 병사를 보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장수 강홍립에게 후금을 자극하지 말고 휴전을 맺고 돌아오라고 명하는 한편, 명이 모문룡 부대를 압록강 입구에 주둔시키자 식량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양반 사대부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 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 대비를 핍박하자(廢母殺弟), 인륜에 어긋나는 정치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를 구실로 권력에서 밀려나 서인이 중심이 되어 정변을 일으켰다. 이로써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인조반정, 1623).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라는 건의를 올렸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서인이 정계에서 쫓겨났다. 정권을 되찾은 동인은 서인에 대한 처리를 놓고 강경파인 북인가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했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 정국을 주도했다.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했다. 그러나 광해군과 북인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했다.



사림은 도덕성과 마음의 수양을 중시하고 이를 향촌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사림은 성리학을 깊이 이해하고자 유교 경전을 연구하고 인간의 심성과 관련하여 이기론을 중심으로 탐구했다. 16세기 성리학자들은 사화를 거치면서 도덕성과 수신(修身)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려는 가운데 인간의 본성이나 자연의 원리를 깨닫는 데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특히 인간의 본성을 이기론(理氣論)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주제는 당시 학문적으로 주된 쟁점이 되었다.



서경덕은 이 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사상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식도 노장사상에 포용적이었으며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했다. 그는 철학적 문제를 토론하기 보다는 의리와 명분 실천을 중시했다. 이러한 학풍의 영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문하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 다수의 의병장이 배출되었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북인과 초기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한 이언적은 이황을 비롯한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황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 이(理)의 능동적 역할을 중시했기 때문에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황은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등을 편찬하여 주자의 이론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반영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세우려 했다. 성학십도는 이황이 선조 때 왕이 이해하기 쉽도록 성학의 개요를 10개의 도해로 설명한 책이다. “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 인격과 학식을 수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황의 사상은 남인 학자들에게 계승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황은 주자의 이론을 조선의 현실에 반영하여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그는 서경덕과는 달리 이가 만물의 근본이며, 기를 이끈다고 주장했다. 그의 학문은 김성일, 유성룡 등에게 이어져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임진왜란 거치면서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이황과 함께 이이는 16세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이는 이보다는 기(氣)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그에 따라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이는 “성학집요”를 서술하여 현명한 신하가 왕의 수양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호문답”에서는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이이는 이황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 강조하여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경향이 있었다. 조정에서 중요한 직책 역임하면서 사회 모순의 극복 방안으로 수미법 실시, 향약의 전국적 시행 등을 제시했다. 그의 학문은 김장생, 송시열 등에게 계승되어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신진 사림은 철저한 척신 정치의 청산을 통해 사림 정치의 실현 주장하면서 동인을 이루었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신진 세력이 다수 참여했다. 반면, 사림에 우호적인 척신들을 포용하자고 주장한 기성 사림들은 서인을 형성.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많이 가담했다. 이처럼 사림은 한문적 경향과 정치적 이념에 따라 무리를 이룬 붕당을 형성했다. 따라서 붕당은 학문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동시에 띠게 되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기론에 멈추지 않고 인간 본성과 관련되는 4단(인의예지)이나 7정(희노애락애오욕)과 같은 심성 논쟁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성리학은 점차 심오한 철학적 논쟁으로 학문적 깊이를 더해 갔으며, 중국의 사상적인 틀 속에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이루었다.



성리학의 발달로 역사 기록과 역사책 편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왕위가 바뀌면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왕의 통치 기록인 사초, 시정기, 승정원일기 등을 모두 합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은 4부를 만들어 춘추관과 전주, 성주, 충주 사고에 보관했다. 16세기에는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사림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여 박상이 “동국사략”을, 이이가 “기자실기”를 편찬했다.



 



【핵심 키워드】



☞ 일본인들은 조선의 통제에 불만을 품고 [3포 왜란]과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비변사]를 상설화하여 대책을 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방 영주(다이묘)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1592).



왜란이 끝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북인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전쟁을 뒷수습하고,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는 현물로 내던 공납을 쌀로 내게 하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그리고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며, 불타 버린 사고를 다시 건립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이는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양반 사대부의 비판을 받았다. 서인이 중심이 되어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인조반정, 1623).



16세기 성리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성을 [이기론(理氣論)]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주제는 당시 학문적으로 주된 쟁점이 되었다. [서경덕]은 이 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사상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식]도 노장사상에 포용적이었으며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했다.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한 [이언적]은 이황을 비롯한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황]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 이(理)의 능동적 역할을 중시했기 때문에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황은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등을 편찬하여 주자의 이론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반영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세우려 했다.



[이이]는 이보다는 기(氣)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그에 따라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이는 “[성학집요]”를 서술하여 현명한 신하가 왕의 수양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호문답]”에서는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왕위가 바뀌면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왕의 통치 기록인 사초, 시정기, 승정원일기 등을 모두 합하여 “[실록(조선왕조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은 4부를 만들어 [춘추관]과 [전주, 성주, 충주 사고]에 보관했다. ☜



 







【예상 문제】



1. (가)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변경 지역에 4군 6진을 설치하였다.



②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규장각을 활용하였다.



③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④ 송시열, 이완을 등용하여 북벌 정책을 추진하였다.



⑤ 사림 세력 중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를 등용하였다.

* 2015학년도 9월 모의평가 5번

?

2. ?다음은 학생들이 만든 역할극 대본이다. (가)에 들어갈 대사로 가장 적절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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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선생닙) : 오늘은 ○○임금의 치세를 평가해 보겠습니다. 이 자리에는 당시 중앙 관직에 계셨던 분들이 나오셨습니다. 그때 있었던 사건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실지 말씀해 주시지요.



사간원 관원 (학생 1) : 저는 당시 대비께서 신임하신 승려 보우 문제로 상소를 올렸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비변사 관원 (학생 2) : 저는 왜인이 쳐들어 와서 겪었던 피해와 이후 조정의 대응책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승정원 관원 (학생 3) : 저는 (가)



① 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했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② 을사년에 일어났던 외척 간의 권력 다툼을 말하겠습니다.



③ 공신들의 반발로 조광조 일파가 제거된 사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④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한 두 차례의 사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⑤ 척신 정치의 청산 문제를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대립을 조명하겠습니다.

* 2013학년도 6월 모의평가 19번

?

3. 강화도 일원의 주요 유적지를 나타낸 지도이다. 표시된 곳들을 답사하기 위해 사전에 학습해야 할 역사적 사실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

[보기]ㄱ. A ?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애니미즘



ㄴ. B ? 고려 시대 몽고의 침입과 무씨 무신 정권의 대응



ㄷ. C ? 조선 시대 왕조실록의 편찬 및 보관



ㄹ. D ? 삼국 시대 천문 관측 기술의 발전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05학년도 6월 모의평가 1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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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 학습 노트의 (가)와의 관계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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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와/과의 관계



?1. △△ 시기



- 동북 9성 설치



- 사대 요구 수용



?2. ○○ 시기



- 진?보 설치, 4군 6진 설치



- 중립 외교 추진



① 초조대장경을 만든 목적을 조사한다.



② 비변사를 설치하게 된 배경을 조사한다.



③ 최무선이 진포 싸움에서 격파한 세력을 조사한다.



④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물리친 군대에 대해 조사한다.



⑤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였던 이유를 조사한다.

* 2011학년도 9월 모의평가 9번

?



5. 다음 자료에 나타난 대외 인식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

화의(和議)로 백성과 나라를 망치기가 … (중략) … 오늘날과 같이 심한 적이 없습니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부모요, 오랑캐는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하된 잘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어 부모를 저버리겠습니까? 하물며 임란의 일은 터럭만한 것도 황제의 힘이어서 우리나라가 살아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 (중략)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① 효종 시기 북벌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② 청 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하고 있다.



③ 국제 관계를 가족 관계의 연장선에서 파악하고 있다.



④ 광해군 시기의 대외 정책을 계승하는 입장에 서 있다.



⑤ 주로 이이의 학통을 이어 받은 붕당에서 이 견해를 지지하였다.

* 2005학년도 수능 9번

?



6.??(가), (나)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

(가) 금이 근래에 갑자기 일어나 요와 송을 멸망시키고 나날이 강대해지고 있는데, 우리와 국경이 맞닿아 있으니 일의 형세상 사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은 나라가 사대하는 것은 옛날 어진 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나) 사대의 명분이 일단 정해지면 이 성에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리하면 또한 청과 군신의 의리를 맺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오랭캐에게 사대하는 것이니 지금 성에서 나가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

[보기]



ㄱ. 윤관은 (가)에 반대하고 별무반 편성을 건의하였다.



ㄴ. 인조는 (나)를 따르지 않고 청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



ㄷ. (가)는 이자겸이, (나)는 강홍립이 제기한 것이다.



ㄹ. (가), (나)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대한 정책을 주장한 것이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10학년도 수능 10번

?



7.?밑줄 친 ‘그’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내가 비록 부덕하더라도 일국의 국모 노릇을 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는 선왕의 아들이니 나를 어미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데도 내 부모를 죽이고 품속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였으며,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치르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중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저버리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① 두 차례 사화를 일으켜 많은 영남 사림을 탄압하였다.



② 외척 간의 권력 다툼을 막지 못해 왕권 약화를 초래하였다.



③ 양전을 비롯하여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④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⑤ 공론의 주재자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 2009학년도 수능 15번

?



8. 다음 글에 나타난 붕당 정치의 전개 과정과 관련하여 탐구할 만한 문제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

초기의 붕당 정치는 동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시작되었는데,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서인에 의해 북인 정권은 몰락하고 이후의 정국은 현종 때까지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① 사화의 발생 원인



② 북벌 운동의 배경



③ 예송 논쟁의 쟁점



④ 정여립의 모반 사건



⑤ 인조 반정 후의 외교 정책

* 2005학년도 6월 모의평가 18번

?



9. 밑줄 친 ‘그’의 재위 시기에 볼 수 있었던 모습으로 적절한 것은?





① 서원 철폐를 반대하는 유생



② 시장에서 당백전으로 거래하는 상인



③ 규장각에서 사서를 연구하는 검서관



④ 대동법 실시를 환영하는 경기도 농민



⑤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소집된 군인

* 2014년 3월 학력평가 6번



 



10. (가)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부과 기준을 호에서 토지 결수로 전환하였다.



② 현물 대신 쌀, 포목, 동전 등으로 징수하였다.



③ 농민에게 부과되는 군포를 1년에 1필료 줄였다.



④ 공인을 통해 국가의 필요 물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⑤ 사창을 설치하여 주민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 2014년 7월 학력평가 11번

?



【정답 및 해설】



?1. 해설 : 정답 ③



③ ‘오랑캐와 우호적인 관계’는 중립 외교를 의미한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였다’는 것은 이른바 “페모살제(廢母殺第)를 의미한다. 이는 서인 세력에게 인조반정(1623)의 명분을 제공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2. 해설 : 정답 ②



제시문의 ‘당시 대비께서 신임하신 승려 보우 문제’라는 표현으로 보아 조선 명종 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왜인이 쳐들어와서 겪었던 피해’와 ‘조정의 대응책’이란 표현에서 을묘왜변과 비변사의 상설화를 짐작할 수 있다.



② 을사년에 일어났던 외척 간의 권력 다툼이란 바로 명종 때 있었던 대윤파(윤임)와 소윤파(윤원형)의 대립 속에 윤임 일파와 인종 때 중용된 사림들이 희생당한 을사사화를 뜻한다.



?3. 해설 : 정답 ③



ㄴ. 몽골은 자국 사신이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대군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1231).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 옮기고 장기 항전 위한 방비를 강화했다.



ㄷ. 조선왕조 건국 이후 실록 편찬 사업과 함께 춘추관의 내사고 외에 지방에도 외사고를 설치했다. 충주, 전주, 성주의 외사고 3곳을 두었는데, 춘추관의 실록각과 합쳐 4사고라 한다. 임진왜란 거치며 전주 이외의 사고가 모두 소실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사고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리하여 강화도,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에 외사고 4곳이 설치되어 5사고 체제를 갖추었다. 강화 사고는 본래 부내(府內)의 봉선전 서쪽에 있다가 1606년 마니산으로 옮겨 신설되었고, 1660년(현종 1년)에는 다시 정족산성의 사고를 새로 마련했다.



<오답 풀이>



ㄱ.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ㄹ. 참성단은 국조(國祖)인 단군에게 제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4. 해설 : 정답 ②



제시된 자료에서 동북 9성 설치를 통해 여진족임을 알 수 있고, 중립 외교 추진을 통해 역시 후금(여진족이 세운 나라)임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가)는 여진족에 해당한다.



② 비변사는 여진 뿐 아니라 왜구의 소란에도 대응하는 기능을 하였다.



?5. 해설 : 정답 ④



④ 광해군 시기에는 명과 후금의 관계가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6. 해설 : 정답 ④



ㄴ.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ㄹ.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다. 조선시대 후금은 청이라는 이름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7. 해설 : 정답 ③



③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8. 해설 : 정답 ①



① 사화는 훈구와 사림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9. 해설 : 정답 ④



④ 광해군은 국내 여론에 밀려 명에 원군을 파병했으나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상황을 보아 파견장수 강홍립을 투항시키는 중립 외교 정책을 통해 후금과의 친선을 꾀하였다.



-> 표 내용 활용



?10. 해설 : 정답 ③



‘농민들은 환영하나 지주들이 불만’이라는 문장은 보통 대동법 관련 문제에서 활용되는 형식이다. 하지만 결작이나 선무군관 같은 키워드를 통해 균역법에 대한 내용임을 파악할 수 있다.



③ 균역법은 농민에게 군포를 1년에 1필로 줄여주는 대신 결작, 선무군관포, 어장세, 선박세 등으로 부족분을 메우는 제도이다. 결작은 지주들에게 감포에 따른 세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부과하였는데, 이는 군역이 일부가 전세화 된 것이며, 간접적으로 양반층에게도 군역을 부과한 효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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