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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구조주의자 도사쿠, 日·中 바둑 하나로 묶다

중앙선데이 2015.12.06 00:33 456호 26면 지면보기

1 고향의 부친에게 보낸 도사쿠의 편지.



1952년 중국 허베이(河北)성 왕두(望都)현에서 한나라 때의 묘 두 기가 발굴됐다. 묘의 주인공은 후한 광화(光和) 5년, 서기 182년에 세상을 떠난 유(劉) 장군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바둑계를 놀라게 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부장품 중에 17줄 바둑판이 있었던 것이다.


[반상(盤上)의 향기] 19줄 바둑판의 발견

위나라 학자 한단순(邯鄲淳)이 일찍이 『예경(藝經)』에서 말했다. “바둑은 가로 세로 17줄로 점은 모두 289개이며 흑돌과 백돌은 각각 150개다(棋局縱橫十七道, 合二百八十九道, 黑白棋子各一百五十枚).” 하지만 그것은 문헌으로만 전해졌지 실제 그런 바둑판이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가 1800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두는 바둑판은 19줄이다. 당나라 때부터 19줄로 두었다는 추론이 있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당나라 이후 오늘까지 19줄 바둑판을 제대로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문제를 좁히자. 누가 19줄 바둑판을 제일 먼저 보았을까.



답은 일본 중세의 명인 혼인보(本因坊) 도사쿠(道策·1645~1702)다.



 

3 도사쿠의 초상.



도사쿠 실력 13단에 해당제4세 혼인보 도사쿠는 1645년 일본의 혼슈(本州) 시마네(島根)현에서 출생했다. 집안의 성(姓)은 야마자키(山崎). 조부는 무장이었는데 무명(武名)을 날린 후 야마자키 마을로 은퇴하면서 마을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도사쿠는 그의 둘째 손자였고, 이후 가문에서는 이노우에 가문의 문주가 두 명이나 나왔다. 제3세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와 제10세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가 바로 그 후손이다.



무가(武家)의 집에서 바둑꾼이 세 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의외의 일로 들린다. 하지만 도쿠가와(德川) 막부 300년을 통해서 가장 태평성대라 불렸던 겐로쿠(元祿) 시대였으므로 바둑은 성행했다.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아들이 재주가 있으면 그 재주를 키우는 것도 좋다. 무예를 닦아서 세상에 나갈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다.”



조부에게 바둑을 배운 도사쿠는 에도(江戶)로 나와 혼인보 가문에 들어갔다. 당시 혼인보는 야스이(安井) 가문에 비해 성망이 떨어져 제자도 몇 없었다. 도사쿠는 재주가 뛰어났다. 맑은 물 솟아나는 샘과 같았다. 나이 23살에 어성기(御城碁)에 참가했고 이후 어성기 17승2패를 기록했다. 패배한 두 판은 두 점을 접어 둘 다 한 집씩 패배한 것으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성적이었다. 1670년 스승 도에쓰(道悅)가 은퇴할 때 도사쿠를 ‘메이진 고도코로(名人碁所·바둑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관직)’에 추천했는데 그 근거로 성적표를 내놓았다. 당대의 실력자들을 선(先), 또는 두 점을 접고 그것도 거의 전승을 기록했다. 단위로 말하면 상대가 7~8단이면 도사쿠는 13단에 해당되었다.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기보 도사쿠 포석은 ‘세 칸 협공’에서 확인된다. 우변 백3은 세 칸 협공 자리를 선점하는 착상으로 좌변 백1과 같은 자리에 있음이 중요하다.



19줄과 17줄은 전혀 다른 세상1668년 명인 자리를 둘러싼 쟁기(爭碁)가 일어나 야스이 산치(安井算知)와 도에쓰가 20국 쟁기 제1국을 두었다. 1670년 제20국이 끝났을 때 도에쓰가 12승 4패 4빅으로 앞섰다. 산치는 승부를 멈추고 은퇴했다. 재미있는 것은 포석의 변화다. 도에쓰는 11국부터 제자인 도사쿠가 창안한 포석을 들고 나왔다. 제자에게 훈수를 들은 것인데, 가문의 흥망이 걸린 승부라 체면 차릴 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대체 도사쿠 포석이 뭐길래 그토록 힘을 발휘한 걸까. 기보 우변을 보자. 백3이 핵심이다. 흑이 침입한다면 A 정도인데 침입 순간 이미 백3에 의해 공격 받는 위치에 처한다. 소위 선점(先占·preemption)의 논리를 활용한 것으로, 귀와 변을 동시에 점거하는 수법이다.



좌변 백1 ‘세 칸 협공(귀에 걸쳐온 돌을 세칸 떨어진 곳에서 협공하는 수법)’도 도사쿠가 제일 먼저 둔 것이다. 공격과 전개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수법이다. a나 b도 협공이지만 백1에 비해서는 좌상귀와의 거리가 멀어서 불안하다. 바로 이것이었다. 좌변 백1이나 우변 백3은 실로 바둑판이 19줄인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협공이었다.



그랬다. 이 수를 볼 때 19줄 바둑판을 처음으로 깊이 이해한 사람은 도사쿠였다. 공격과 전개를 동시에 하는 것으로 공격 지향의 중국 바둑과 집 지향의 일본 바둑을 하나로 묶었다.



 



고대 중국 바둑은 싸움이 전부였다. 여기서도 싸우고 저기서도 싸웠다. 수학자 콘웨이(J. Conway)가 말한 바, 중국의 바둑은 부분합(部分合)의 게임이었다. 결과는 여기저기서 싸운 것을 합한 것에 불과했다.



 

4 중국 왕두현에서 출토된 석제(石製) 바둑판. 지금과 달리 17줄이었다.



도사쿠의 논리는 이렇다. 미리 놓인 돌(착점 n)이 다음 수를 제한한다. n+1번째 수는 n번째 수에 의해 제한된다. 곧 구조주의 논리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부분은 관계에 의해서 의미와 활용이 제한된다. 결혼 전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 후 자식을 낳으니 아버지가 된다. 자식과의 관계가 남자의 속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혁명이었다. 반상이 19줄인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싸움이고 저기서도 싸움이라면 19줄이든 17줄이든 21줄이든 결과는 관계없다. 그에 비해 19줄을 이용해 싸움을 한다면 17줄과 19줄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바둑을 게임으로 보는 시대 열려오늘날 우리가 두는 것은 자유포석제. 그런데 일본에서 처음 발생한 자유포석제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반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문제 말이다. 텅 빈 대지. 그것은 불안하다. 텅 빈 들녘은 고독한 곳이다. 그것이 불안. 자유포석제가 지배적인 규칙이 된 이후 불안이 반상을 지배했다. 그 불안을 어떻게 잠재우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 불안은 바둑판이 무엇인가를 확인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다. 불안으로부터의 탈출, 그 귀착점이 도사쿠의 19줄 반상에 대한 이해였다. 19줄 조건을 이용할 수 있다면 불안하지 않다.



비로소 바둑을 게임으로 보게 되었다. 게임으로 보는 것은 곧 투사를 거둬들이는 것. 바둑을 천문의 투영으로 본 것이나 음양이나 도(道)나 병법의 이치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투사다. 도사쿠에게는 반상의 조건만이 반상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19줄 정방형 놀이터, 그것이 바둑의 유일한 조건이다.



세상을 분류하고 살아가는 데 우린 언제나 전체 속에서 틀을 갖춘다. 부분적인 변화는 전체를 전제해서 얻어진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그렇고 원시인들도 다를 바 없다. 바둑도 그런 것이다.



바둑을 반상이 아닌 세계, 즉 우주관으로 비유하는 것은 오랜 습관이었다. 비유의 세계다. 하지만 바둑을 반상의 논리로만 설명하려는 태도는 설명의 세계다. 비유의 세계로 바둑을 두면 초보자도 어느 정도 반상에 돌을 놓을 수 있다. 문외한도 가능하다.



두 세계가 전쟁을 벌였고 도사쿠가 나타나 싸움은 종말을 고했다. 설명의 세계가 비유의 세계를 압도했다. 도사쿠는 17세기 당시 일본 바둑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천문의 비유를 압도했다. 많은 기보가 남아 있다. 도사쿠는 한 판도 지지 않았다.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다.



도사쿠 이후 바둑의 세계는 크게 확장됐다. 비유에서 설명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수법의 근거가 달라졌다. 곧 세계의 확장이었다. 눈 앞이 확 트였다. 그 후 200여 년. 일본은 중국을 석점이나 앞설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2 1682년 류큐(琉球)의 소년기사 하마히카(濱比賀)에게 3단을 인허하는 도사쿠의 국제 면장(免狀). 당시 류큐는 일본에 속하지 않은 독립국가였다. [사진 일본기원]



뛰어난 제자 키웠지만 대부분 요절도사쿠 시절 바둑계는 흥왕했다. 종가제도가 확립됐다. 4대 가문이 질서를 잡기 위해 단위를 제정했고 이것이 또 아마추어에게 단위를 주는 면장(免狀) 발행으로 발전했다. 면장 발행은 한직의 무사와 돈 많은 장사치들에게 바둑이 크게 보급되어 있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세상이 태평했다.



메이진 고도코로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다. 그것은 1670년 도사쿠가 고도코로에 취임하면서부터다. 승부세계에는 1인자가 왕이다. 불만이 있다면 “그래? 그럼 어디 한 판 붙어 결정하자” 그리 말하면 끝이다. 제자가 운집했다. 서른 명을 넘었다.



하지만 큰 나무 아래에는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가. 그에게는 뛰어난 제자가 다섯이나 있었지만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요절했다.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심월(心越)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리 말했다. “하늘이 최고의 명수를 등장시킬 때에는 그 권위를 옹호한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준재가 자라고 있다면 반드시 그 중에 일찍 죽는 자가 있을 것이다.”



1702년 병석에 누운 도사쿠는 자신의 첫 제자였지만 이노우에 가문으로 보낸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를 불렀다. 후계자를 지명하기 위해서였다. 후계자는 도사쿠의 숨겨진 아들로 의혹을 받는 도치(道知)였다. 혼인보는 일련종(日蓮宗) 계통의 승려 가문으로 공식적으로는 처(妻)를 둘 수 없는 처지였다. 도사쿠의 법명은 닛츄(日忠)였다.



“도치는 올해 13살이다. 바둑은 아직 두 점 정도지만 장래에 반드시 상당한 실력자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기회에 도치를 후계자로 정한다. 내가 죽거든 너는 도치의 후견인이 되어 장차 명인이 되도록 키워주기 바란다. 지금 너는 상수(上手·7단) 격이지만 반점(半点)을 올려 명인과 상수 중간의 칫수로 올려주겠다. 대신 넌 명인이 되지 마라.”



많은 문하에다가 야스이(安井)·하야시(林) 양 가문과 장기계의 명인까지 입회시키고서 인세키에게 서약서까지 쓰게 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도 인간이던가. 바둑에 그렇게 뛰어난 도사쿠도 인간이던가. 인세키는 뒷날 명인이 되었다. 도치도 명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도사쿠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때의 일이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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