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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김·오히라 메모, 5·16 반공 국시, 차지철 임명…JP가 끄집어낸 비록들, 역사에 새로운 생명 불어넣었다

중앙일보 2015.12.05 01:45 종합 1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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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笑而不答(소이부답)’은 현대사 기록이다.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역사 비록(秘錄)의 창고에 있던 수많은 이야기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14·끝> ‘김종필 증언록’이 밝혀낸 현대사 새로운 진실

JP는 그것에 햇빛을 쬐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잘못 알려진 현대사의 진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JP의 증언은 역사 기록의 무대에 긴장감을 준다.

근거 없는 현대사 논쟁, 왜곡된 신화, 굴절된 사건 기록들은 이제 수정과 재구성의 상황을 맞게 됐다. 중앙일보 ‘증언록 팀’은 JP의 증언을 검증하고 확인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에 2015년 3월부터 12월 초까지 매주 3회, 114회 연재됐다. 그의 회고 중 ‘새로운 진실’ 10가지를 뽑아 소개한다.

박정희 사상 의혹 씻어낸 ‘반공 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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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는다’. 1961년 5·16 거사 때 발표한 이 ‘혁명공약’(사진) 제1항은 박정희 소장에게 쏠린 좌익 의혹을 씻기 위해 썼다는 사실이 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드러났다. JP 는 혁명공약의 작성자다. 그는 “박정희 장군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게 사상 의심이었기 때문에 이를 불식하기 위해 반공 국시를 첫 번째로 집어넣었다”고 회고했다. 이 공약을 처음 읽은 박정희 소장은 “이거(제1항) 나 때문에 썼구먼”이라고 반응했다. 이는 박정희 시대 역사의 새롭고 흥미로운 진실이다.

‘혁명공약’의 마지막은 원대복귀다.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한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이라는 제6항은 박정희 소장이 추가한 것이다. JP는 “나는 ‘어차피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말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2015년 3월 3일자 4면>


박정희 권력의지 약해 JP, 장도영 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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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혁명 직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 의지가 약했어. ‘나 그만두겠다,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지-.” 박정희의 권력 이미지는 냉혹하다. 1970년대 후반 유신독재 시대 때문이다. JP의 증언은 박정희 권력의 인상을 깬다. 5·16 세력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중장·사진 오른쪽)을 최고회의 의장으로 옹립했다. 부의장은 박정희 소장. 5·16 두 달 뒤 장도영은 체포됐다. 그것은 중앙정보부장 JP의 독단적 결행이었다. JP는 “내가 장도영의 체포 사실을 보고하자 박정희 장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기억했다.

JP는 “장도영은 자기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어. 그것이 5·16 주체 세력의 내분을 일으킬 것으로 판단해 제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장도영 제거는 박정희의 군 복귀 퇴로를 막았다. “박 대통령의 약한 권력 의지를 굳건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가 권력에 자신감을 가진 시점은 60년대 후반부터다. <4월 6일자 6면>


황태성, 밀사 아닌 김일성이 보낸 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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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무역성 부상 출신인 황태성(사진)은 1961년 8월 말 남파됐다가 중앙정보부에 체포됐다. 그는 “나는 김일성이 보낸 밀사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김종필 정보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박정희는 셋째 형(박상희)의 친구인 황태성을 어릴 적부터 “형님”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JP는 “황태성의 체포 사실을 전하자 박 의장의 얼굴이 새하얘졌다”고 말했다.

JP는 “황은 밀사가 아니라 큰 간첩이었다. 김일성은 나와 박 의장을 만나 북한에 합류하도록 설득 공작을 해보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했다. 미국 측의 요구로 황태성의 신병을 미 CIA(중앙정보국)에 넘겼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JP는 “미국은 황과 박 의장의 관계를 의심하고 조사를 질질 끌었다. 대선에서 졌다면 이를 문제 삼아 결딴내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측은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황태성의 신병을 돌려줬고 63년 12월 14일 사형이 집행됐다. <4월 22일자 6면>


김·오히라 메모 진본은 손바닥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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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정보부장은 오히라 일본 외상과 대일 청구권(請求權) 자금의 기본 골격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이 내용을 메모지에 각각 써서 남겼다. 이튿날 JP는 박정희 의장에게 내용을 보고한 뒤 배석한 최덕신 외무부 장관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43년 뒤인 2005년 외교부가 공개한 한일회담 관련 비밀 외교문서엔 청구권 자금 액수와 조건이 적힌 2쪽짜리 A4크기 서류(사진)가 있었다.

‘Top Secret’이란 영어 제목과 함께 ‘오히라 외상이 (JP에게) 각 문제 토의 때 설명한 별첨 메모’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 서류는 ‘김-오히라 메모의 원본’이라고 보도됐다. 이 서류는 김종필-오히라 회담 때 작성된 메모로 간주됐다. 하지만 JP는 “이 문서는 내가 작성한 게 아니다. 김-오히라 메모지는 손바닥만 하다. 한글과 한자만 있다”고 증언했다. 메모의 진본은 관리 소홀로 사라졌나, 아니면 어두운 창고 어딘가에 묻혀 있을까. <5월 4일자 6면>


독도 폭파론·밀약설은 실체없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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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폭파론은 박정희·김종필 반대 세력의 단골 메뉴다. 오히라 외상과 회담 중 JP가 “독도가 문제 된다면 폭파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오히라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기자”고 제안하자 JP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독도를 폭파하면 했지 당신네들한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에 독도를 넘겨줄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독도밀약설’도 JP는 부정했다. 독도밀약설은 65년 정일권 총리가 ‘독도를 미해결 상태로 놔두자’는 밀약문을 일본 정부와 비밀리에 작성해 박정희의 승인을 받았고 이 문서를 JP의 셋째 형 김종락씨가 지니고 있었다는 의혹이다. JP는 “밀약, 밀약문은 없었다. 정일권 총리가 일본 측 생각을 전한 것이 밀약설로 부풀려진 것이다. 종락 형님도 그런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5월 4일자 6면>


박정희는 이승만의 환국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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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오른쪽 둘째) 전 대통령은 4·19 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에 머물렀다. 62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중앙정보부장 JP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우남(雩南)을 뵙고, 돌아오시겠다고 하면 정중히 모셔라-.”

JP는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이 전 대통령 부부를 만났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박 의장이 내어준 2만 달러를 전해 드렸는데, 파란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렸어. 이 대통령의 건강 상태가 나빠 환국이 불발됐지.” JP는 “그런데 박 대통령이 환국을 막았다고, 거짓이야”라고 했다.

당시 외무부 기획조정관이던 김영주씨는 “62년 3월 박 의장의 전화를 내가 직접 받았어요. 귀국 시기는 정부와 협의하라고 했을 뿐 이 박사 귀국은 안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박 의장의 전화 지시는 이행 과정에서 “이 박사의 귀국은 안 된다”는 것으로 변질, 과장된다. <7월 17일자 12면>


김재규 ‘민주투사’는 각색·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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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사진)는 재판에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했다. 그는 ‘민주투사론’을 자임했다.

JP는 김재규를 ‘발작증 환자’로 규정하고 그 사례를 들었다. “김재규는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패했고 발작증이 도져 총을 쏜 것”이라고 했다. 79년 10·26 그날 밤 현장에 동석했던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으로부터 사건 전말을 들었다. “김계원씨는 김재규의 발작 과정을 소상히 이야기해 줬어. 그 후에 그는 내게 한 이야기를 번복하지 않았어.”

78년 2월 김재규는 JP에게 “중앙정보부는 앞으로 박 대통령을 종신 대통령으로 모시는 임무에 기능과 자원을 집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JP는 “종신 대통령을 거론한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운운했는데 말이 되느냐. 더구나 그는 권총에 총알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도 몰랐어”라고 했다. <8월 5일자 12면>


DJ 납치는 이후락의 권력 처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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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8월 도쿄에서의 김대중(DJ·사진) 납치사건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소행이다. 왜 이후락은 DJ를 납치했는가.

김종필은 이를 “이후락의 죽을 꾀”라고 했다. “이후락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을 일을 꾸며서 권력의 존재감을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에 이후락은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73년 1월에 터진 윤필용 사건에 이후락은 연루된다. 이 사건으로 이후락은 박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다.

JP는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이후락이 자기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꾸며 재간을 부린 것이 DJ 납치사건”이라고 했다. JP는 당시 국무총리였다. JP는 박 대통령이 “이후락 그 자가 서울에 김대중을 데려다 놓은 뒤에야, 나한테 보고를 하잖아. 나한테 한마디도 않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라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7월13일자 12면>


차지철 경호실장, 육영수의 유작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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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8월 15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숨진다. 재일동포 문세광의 총에 맞았다.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는 인책됐다. 후임에 차지철(사진 오른쪽) 당시 공화당 의원이 기용됐다. 당초 물망에 오른 사람은 오정근 의원이다. JP는 “박 대통령이 후임에 누가 좋으냐고 물어 오정근을 추천하자 박 대통령도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런데 밤사이에 차지철로 바꿨어.” 그것은 미스터리다.

JP는 “생전에 육 여사가 입버릇처럼 차 의원을 써보라고 박 대통령에게 권유했다. 술·담배를 안 하고 고지식하고 독실한 신자라는 게 육 여사의 차지철에 대한 평가였어. 혼자 잠자리에 든 박 대통령은 육 여사의 그 말이 생각나 차지철을 쓴 게지.” 그는 “박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을 스캔들 없이 스스로 단속하기 위해 차지철을 기용했는데, 결과는 반대였어”라고 했다. 차지철 인사는 육 여사의 유작(遺作)인 셈이었다. <7월 22일자 12면>


박정희 기념관은 DJP 해원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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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대선에서 김대중(DJ)의 당선은 DJP 공조의 산물이다. 그 공조는 역사의 흐름을 깼다. 박정희 시대에 DJ는 정적(政敵)이었고 충돌했다. DJ는 민주화 세력의 간판이다. JP는 산업화 세력의 상징이다. 정치 역정에서 ‘적과 동지’는 어떻게 합했을까. JP는 “대선 두 달 전에 DJ가 우리 집에 찾아왔지. 나는 ‘박 대통령 시대에 많은 수모와 고초를 겪었는데 그것을 내가 씻어드리고 도와주겠다’고 했지.”

JP는 그것을 역사의 해원(解寃)으로 설명하면서 “나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라고 했다. JP는 내각제 개헌과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요청했다. DJ는 집권 후 기념관 약속을 실천했다. 박정희 기념관은 DJ 시절 200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았으나 노무현 정권 때 건립이 연기됐다. 우여곡절 끝에 2012년 완공된 기념관은 DJP 통합 정신의 산물이다. <10월 23일자 12면>


[S BOX] 14개월간 매주 JP와 토요 인터뷰 …
녹취록 1200쪽 동영상 80시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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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1일 김종필(JP) 전 총리 자택에서 기념촬영을 한 JP와 중앙일보 ‘김종필 증언록’팀. 뒷줄 왼쪽부터 한애란 기자, 전영기 논설위원, 박보균 대기자, 최준호 기자. [김춘식 기자]


2014년 10월부터 지난 11월 말까지 꼬박 14개월이 걸린 긴 여정이었다. 매주 토요일 서울 신당동 김종필(JP) 전 총리 자택 거실에선 김종필 증언록을 위한 인터뷰가 진행됐다. 50년 가까이 벽에 걸린 ‘笑而不答’(소이부답) 편액이 내려다보는 거실에서 JP와 4명의 취재기자, JP 곁을 오래 지켜온 보좌관 2명이 매주 만났다.

 토요 인터뷰는 총 51회에 걸쳐 진행됐다. 하지만 정례 인터뷰만으로는 JP의 90 인생을 정리하기에 빠듯했다. 보충 질의를 위한 평일 인터뷰가 수시로 이어졌다. JP는 “언제든 무시로 와도 돼”라며 기자를 반겼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지는 인터뷰에 JP는 지친 기색 없이 생생하게 기억을 되살려냈다. 그동안 진실로 여겨졌던 내용을 통째로 뒤집어버리는 증언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면 JP는 “어때 놀랐지? 내가 이거(증언록) 남기기를 잘했네”라며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기자들이 구술받아 정리한 증언록은 매회 JP 본인이 꼼꼼히 검토했다. 때로는 수식어 하나까지 손봤다. JP는 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장은 감동이 있어야 해. 감동이 없으면 죽은 문장이야.” JP와 인터뷰는 증언록 연재 기사뿐 아니라 A4 용지 1200쪽 분량의 녹취록과 80시간 분량(40회)의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역사적 기록이다.


각계 인사들이 본 ‘김종필 증언록’

박찬종 전 의원   5·16으로 성공적 국가 개조, 역사에 기록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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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창업 이래 몇 차례 있었던 체제 변혁의 기도가 모두 실패했고 20세기 들어 5·16 거사만이 성공했다. 5·16을 디자인하고 전개한 사람이 JP다. JP의 5·16은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과 조건·환경·결과가 유사하다. 박정희 대통령 체제 18년은 공과(功過)가 있다. 그 공의 최소한 절반은 JP의 몫이다. 과에도 책임이 없진 않지만 절반에 못 미치는 작은 책임이다. 이 점이 역사적으로 평가되리라고 확신한다. 만약 10·26을 맞고 난 뒤 JP가 은둔했더라면 그는 역사에 더 크게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 “민주주의, 빵 먹고 자란다” 정치인 사명감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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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 이 말은 JP 증언록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경제 발전의 토대 위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압축한 말이다. 경제와 정치가 모두 위기에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국가가 무엇이냐, 정치를 왜 하느냐는 물음에 서슴없이 대답할 만한 국가관·정치관을 지닌 정치인이 많지 않다”고 일갈하신 원로 정치인의 말씀이 가슴을 파고든다. JP께서 존경하신 윈스턴 처칠의 용기를 되새기며 정치의 숭고한 사명을 다지게 된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정치는 허업”이라는 말 왜 했는지 알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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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을 한 회도 빠지지 않고 다 읽었다. 증언록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담겨 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생생한 역사 그 자체다. ‘하얗게 타 버린 재와 서쪽 하늘의 벌건 태양’의 비유에서 왜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가슴 깊이 와 닿았다. 파란의 역사를 관통하는 그의 삶은 미래 세대에게 공과 과를 분명히 보여 준다. 역사에서 배우는 가장 큰 교훈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JP의 회고는 역사에서 배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모든 이에게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영애 배우   문화·예술 인프라 마련해준 ‘다빈치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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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문화·예술인 JP를 만났다. 그는 문자 그대로 ‘다빈치적 인간’이다. 손수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고 유화를 그린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한국 현대 문화·예술계의 인프라를 깔아 주신 분이라는 사실에 경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음악예술단체 예그린악단을 만들어 창작뮤지컬을 공연할 수 있게 했고, 세종문화회관 건립 때 동양 최대 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런 그의 손길은 미술·체육계에도 뻗어 있었다. JP는 한국 문화·예술인들에게도 큰 어른이다.


황은연 포스코 경영지원본부장  묻혀버릴 뻔한 진실 생동감 있게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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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권력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권력에 물들지 않았고, 자신이 최고가 돼야 한다는 독선을 버렸기에 역사에 당당할 수 있었던 주인공의 소신에 찬 삶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가슴이 벅찼다. 자칫 영원히 묻혀 버릴 뻔했던 중요한 역사적 진실이 중앙일보의 정성과 취재력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난 것이 다행스럽다. 포항제철·울산화학공업단지·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으로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끈 주역의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는 일성이 큰 울림으로 남는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현대사 연구자로서 더 세밀한 구술 받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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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부답’은 JP 개인을 넘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기록이다. 논란이 됐던 박정희·김종필의 좌익활동 의혹과 5·16 쿠데타, 황태성 사건, 핵 개발 추진과 내각제 개헌 파동, DJP 연합에 대한 증언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실마리를 주고 있다. 김·오히라 메모의 진위 문제는 공문서 보관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압권은 박정희 대통령의 변해 가는 모습뿐만 아니라 중심 권력으로부터 JP 자신의 위치가 변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는 점이다. 현대사 연구자로서 중요 부분에 대한 세밀한 구술을 다시 요청하고 싶다.


에릭 월시 주한 캐나다 대사   한국 근대화·민주화 과정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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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은 지난 수십 년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나는 그의 회고록 ‘소이부답’을 중앙데일리 영어 번역본으로 읽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이튿날 연재된 ‘JP가 본 YS의 정치인생’(11월 23일자, 108회) 편이 인상 깊었다. 이 글은 나에게 대한민국의 근대화·민주화 과정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줬고, JP가 3김씨의 마지막 생존자이기에 더욱 절절하게(poignant) 다가왔다.

정리=전영기.최준호.전승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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