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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턱시도 입고 뻘쭘했던 YS, 청와대 나와 삼각지 다다르자…"기수야, 여기 한강이 가깝데이"

중앙일보 2015.12.05 01:30 종합 1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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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 실장은 “묵묵히 말 없이 사는 게 비서”라며 “이게 마지막 인터뷰일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선 “전국에 안 가본 데가 너무 많고 골프도 못 배웠다. 아름다운 강산을 둘러보고 정치 하는 후배들 도와주는 원로로 남고 싶다”고 했다. [강정현 기자]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

[?이정민이 만난 사람] 37년간 YS 수행 ‘마지막 비서실장’ 김기수

87년 대선 패배 후 대청봉 올라
양푼에 소주 마시며 재기 다짐

야단치고 나선 뒤끝 없이 잊어버려
비서들에게 욕한 적 한 번도 없어


 한번도 비서실장이란 직함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그는 비서실장으로 통한다. 늘 직함 대신 “기수야!”라고 불렀던 YS도 생전에 그를 “마지막 비서실장이데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지난달 22일 서거한 YS의 곁을 37년간 지켜온 김기수(70) 전 대통령 수행실장의 얘기다.

 한평생을 누군가의 비서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지난 3일 서울 상도동 YS 사저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이웃집을 개조해 사저와 연결해 지은 경호동에서 이뤄졌다. YS가 재활치료에 사용하던 보행보조기와 이동식 의료침대, 의료기기들이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YS를 ‘각하’로 호칭했다. YS와 함께했던 37년의 순간들을 옛 필름을 다시 꺼내 되돌려 보는 듯 놀랄 만큼 예리하게 기억해냈다. 평생 모셔온 주군 YS가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내재돼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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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김기수 수행실장(왼쪽)이 경북 경주시 경주역 광장에서 열린 유세장에서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선 후보에게 보고하는 모습. [중앙포토]

 - YS 서거 열흘이 지났다.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느낌이다. 방쪽을 쳐다보고 앉아 계시는 것 같다. 이렇게 쉽게 빨리 운명하시리라곤 생각 못했다. 비서들과 팔씨름도 하고 차남(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 오면 도전하라고 팔 굽혀 보이며 의사 표시를 하시곤 했는데….”

 -건강 관리를 잘해오셨는데.

 “DJ(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에 다녀오고 나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30도가 넘는 8월 삼복더위(2009년 8월 18일)에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차양도 없는 데서 두 시간 넘게 앉아 계셨다. 집에 왔는데 옷이 땀으로 다 젖었더라. 그날 탈수 현상이 아주 심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1987년 대선에서 패배했을 때와 내가 큰 실수를 저지른, 이른바 ‘턱시도 사건’이 떠오른다.”

 - 87년 패배는 양김 분열로 인한 거여서 상심이 컸을 텐데.

 “목표가 있으면 거기로 매진하는 분이다. 그해 12월 31일 이성헌(전 새누리당 의원) 비서, 운전기사 김용수랑 셋이 모시고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 귀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군인들이 쓰던 대청봉 벙커에서 각하가 양푼에 소주를 따라줬다. 단합이 안 돼 군사정권 5년을 연장하게 된 걸 아쉬워하셨다. 천추의 한이라고 했다. 그러곤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대청봉이 1706m 고지에 있어 관리소 전화번호가 1706이다. 대통령이 돼 초도순찰 때 꼭 대청봉관리소에 전화를 하셨다.”

 - 비서들에게 엄격했나.

 “뒤끝이 없었다. 나처럼 무능한 사람도 야단치고 나선 잊어버린다. 한번도 비서들에게도 욕을 한 적이 없다. 또 비서의 허물을 덮어주셨다. 한번은 중요한 일인데 깜빡 잊어버리고 보고를 못한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제가 잊어버렸습니다’고 하니까 ‘와 지금 얘기하노? 내일 모레나 하지’ 하시더니 직접 전화를 걸어 수습을 하고 책임을 따지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하겠나.”

 그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3당 합당 후 여당이 된 민주자유당 대표 시절 얘기다. 청와대에서 몽골 대통령 방한 축하 국빈만찬이 열렸고 YS가 초대됐다. 오랜 야당 생활에 익숙한 YS의 민주계는 의전에 약했다. 국빈만찬이라니까 당연히 턱시도를 입어야 하는 줄 알고 급히 턱시도를 맞춰 입고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가 보내준 초청장의 드레스 코드를 보지 않았던 거다. 영빈관에 들어서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당시 몽골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턱시도를 입지 않는 게 관례였다. 분위기를 알아챈 이병기(현 대통령 비서실장) 의전수석이 YS에게 “대표님, 레벨에 떨어지는 옷을 입으면 결례지만 턱시도는 괜찮습니다.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만 혹 불편하시다면 제 옷을 입으시겠습니까”고 물었지만 YS는 “괜찮다”며 그대로 입장했다. 사달은 상도동으로 귀가하는 자동차 속에서 벌어졌다. 평생 잊지 못하는 ‘턱시도 사건’의 순간을 김 실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아마 참석자들이 (YS가) 차기 대선후보니까 눈도장 찍으려고 많이 쳐다본 것 같다. 좋으면서도 속으론 부끄러웠던 같다.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네거리쯤 왔는데 ‘아까 받은 거 뭐꼬? 그거 읽어봐라’ 하더라. 초청장을 보니까 남자는 평복 또는 신사복, 여자는 한복 내지 양장이라고 돼 있었다. 모골이 송연하고 땀이 쫘악 나더라. 그런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가 삼각지쯤 왔는데 ‘기수야. 여기 한강이 가깝데이’라고 하셨다.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상도동에 도착하니 영부인님(손명순 여사)이 내 등을 치면서 ‘아저씨, 대표님 얘기가 너무 과하셨지. 괜찮아요’라며 위로해주셨다. 그 뒤로 각하는 그 얘기를 안 하셨다.”

 YS는 사람에 대한 욕심이 컸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전 대표, 홍준표 경남지사 등 ‘YS 키즈’들이 전면에서 정치를 이끌고 있다. YS 용인술(用人術)의 핵심은 뭘까. 김 실장은 자신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는 열린 마음과 사람에 대한 관찰이라고 봤다.

 “각하는 ‘좋은 사람 있습니다’ 하면 과감하게 발탁해 썼다. 강원도에 지게꾼 박경수(14대 국회의원·원주-횡성)란 사람이 있었는데 성실하고 신망 있다고 추천이 들어왔다. 서울로 오라니까 차비도 없고 양복도 없다며 못 올라온다고 했다. 얼굴도 안 보고 공천을 줬다. 상대 후보는 상이군경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었지만 박 의원이 이겼다.”

 - 인재를 가려내는 비상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각하는 사람 보는 눈이 밝다. 눈을 한참 쳐다보는데 용눈이다. 눈이 무서워 거짓말하지 못하고 결국 이실직고하게 된다. 누구 얘기하면 신기하게 거짓말한 걸 다 기억하셨다. 또 사람을 귀하게 대접했다. 평소 사람을 많이 만나 귀를 열어놓고 많이 듣는다.”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등 개혁 조치가 당시엔 논란이 많았지만 지금 재평가받고 있다. 앞서 치고 나가는 ‘시대정신’을 체득하는 비결은 뭐였다고 보나.

 “누가 주입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타고나는 거다. 각하는 호불호를 떠나 국가와 국민을 위해 옳은 길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가 깨지지 않았을 때 부실기업 한보를 과감히 정리했고 귀족노조 문제점을 간파하고 노동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92년 대선 후보 시절엔 전교조가 노조로 인정해 달라고 자택으로 몰려왔다. 선거를 앞둔 때였는데도 ‘사도를 걷는 선생들이 붉은 띠를 두르고 주인도 없는 집에서 무슨 일이냐’며 호통을 쳐 다 쫓아냈다.”

 -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각하는 샅바를 잡으면 안 놓는다. 미래의 대통령, 군정 종식, 지자제, 실명제, 재산 공개… 다 이뤘다. 당시 금융실명제 한다니까 부산에서 ‘부산 영도다리 밑에 엄지손가락이 둥둥 떠다닌다’는 협박 전화가 많이 걸려왔지만 밀고 나갔다. 지금 같으면 누가 할 수 있겠나. YS가 즉흥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대통령 되기 전부터 대학노트에 다 써놨던 것들이다.”

 - 야당 총재이던 DJ가 청와대 가서 칼국수를 먹고 돌아와 당사 지하 식당에서 아귀찜을 시켜 먹어 화제가 됐다. 다른 에피소드는.

 “칼국수는 풀어져 큰 행사 때는 못하고 20~40명 초청행사 때까지 할 수 있다. 당시 MBC 이인용(현 삼성전자 사장) 앵커가 초대받은 뒤 돌아가 어머니에게 자랑 삼아 ‘칼국수가 다 풀어져 숟가락으로 떠먹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안동 출신인 어머니가 청와대 주방 직원에게 콩가루를 넣고 질기게 반죽하는 안동국시 노하우를 알려줘 그 후부턴 국수가 좀 질겨졌다.”

 - 민주화운동의 동반자이자 정적이던 DJ와는 생전에 화해하지 못했다.

 “각하는 IMF 외환위기의 책임이 당시 야당에도 있다고 봤다. 야당 후보이던 DJ가 IMF 재협상론을 들고나오고 국회에서 통과시킨 노동법 개정안을 거꾸로 되돌리고 노조를 감쌌다. DJ 취임 직후 청와대 회동 때 ‘IMF 위기를 불러온 데 대해 야당의 책임도 절반이다. 대국민 사과를 하라’고 요구했는데 DJ가 거부했다. 그 뒤론 청와대에서 불러도 안 가셨다. DJ가 서거하고 조문 가서 기자들에게 ‘화해했다’고 말했다.”

 - 차남 현철씨의 정치 입문을 놓고 갈등설도 나왔다.

 “아들이 하는 걸 말릴 수는 없는 거지만 정치는 험난한 길이니까 친·인척이 정치 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 김 실장도 정치에 뜻이 있지 않았나.

 “마포에 공천 신청을 냈는데 동교동계인 노승환(전 국회부의장)씨랑 붙으면 되느냐며 빼라고 해 철회했다. 공천을 받으려면 최형우·김동영 전 의원 등 계보 보스들에게 세배도 다니고 해야 하는데 그런 걸 안 했다.”

 - 스스로 공천 포기한 데 대해 YS는 뭐라고 했나.

 “‘한번 기회를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데이…’ 하시더라. ‘괜찮습니다. 저는 (이북 출신이어서) 평양 가서 하겠습니다’고 했다. 각하와 더불어 한국 정치에 보이지 않게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내 보람이다.”

 - 직언하는 비서였다고 생각하나.

 “‘안 됩니다’가 아니라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 ‘그거 신문에 났나?’ 하고 물으셨다. 소스가 어디냐고 묻는 거다. ‘○○호텔 지배인 ○○○ 얘깁니다’라고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경청하셨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S BOX] 42세 늦깎이 결혼, 정치집회장 된 예식장

김기수 실장은 한양대 교무처 직원으로 있던 1979년 YS와 인연을 맺었다. YS 대선 캠프의 모태가 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다. 김봉조 전 의원을 실장으로 3명의 필사원들이 유인물과 전국 장로·목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작성하면 거기에 우표를 붙여 발송하는 일을 맡았다. 80년 ‘서울의 봄’ 땐 전국의 대학생들을 조직해 외곽에서 YS 지지를 이끌어내는 학생조직을 담당하기도 했다.

 “홍인길(전 의원) 선배가 80년 봄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앞으로의 시국대책에 대한 글을 써오라고 했다. 대학과 종교계를 드나들어야 하니까 내공을 보기 위한 거였다. 노트 반 권 분량의 글을 써 냈는데 통과가 됐다. 월급도 없었고 점심 때 짜장면 한 그릇 사주는 게 다였는데 돌아가면서 점심·저녁을 샀다. 밥 사는 사람이 오야붕이던 시절이었다.”

 -YS 수행을 맡게 된 건.

 “83년 (YS의) 23일간의 단식이 끝나고 나서부터다. 밤새 서울 곳곳을 다니며 집집마다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매일 그러고 다니니까 경찰서 유치장에서 신세진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내가 묵묵히 한다는 걸 각하가 다 듣고 아셨다. 나를 자르자는 건의도 많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경복고·한양대를 나온 김 실장은 결혼(42세)이 늦었다. 신민당 돌풍을 일으킨 2·12 총선 이듬해인 86년 종로에 있는 천도교회관에서 식을 올렸다. 너무 바쁜 나머지 결혼식장 예약을 이성헌 전 의원에게 맡겼다. 결혼식을 위장해 정치집회를 하는 것으로 오해, 결국 호적등본을 떼다 주고야 식장 예약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엔 YS·DJ 내외는 물론 야권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정치집회 아닌 정치집회가 된 셈이다. DJ는 ‘김대중·이희호’란 이름이 새겨진 결혼 앨범을 선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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