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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제 나이에 맞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중앙일보 2015.12.05 00:22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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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

내 안에는 일곱 살 꼬마와 꿈 많은 스무 살 여대생과 이제 좀 인생을 아는 중년 여인과 산전수전 다 겪은 꼬부랑 할머니가 함께 살아간다. 다양한 연령대의 자아들이 어울리는 순간에 제때 튀어나와 주면 좋으련만, 자꾸 결정적인 순간에 엉뚱한 자아가 튀어나와 문제다.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 느닷없이 철딱서니 없는 일곱 살 꼬마가 튀어나와 당황스럽고, 오랜만에 귀여운 척 애써 연기하고 싶을 때는 세상 다 살아버린 듯한 구수한 노파가 튀어나와 로맨틱한 분위기를 망쳐 버린다. 나이에 맞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항상 지나치게 조숙하거나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무리의 막내 역할을 떠맡으면서 ‘나는 항상 내 나이를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는 서늘한 소외감을 짊어지고 다녔다. 때론 너무 조숙했고, 때론 너무 철없는 내가 걱정스럽다. 제 나이에 맞게 사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울까.

인생을 즐길 줄 안다고 느낄 때 중년은 아름답다
훈계보다 인생으로 모범 보이는 노년이 귀감이다


 제 나이에 맞게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아직도 쉽지 않은 화두지만 살아 오면서 멋있게 나이 드는 이들을 볼 때마다 발견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예쁠 때는 ‘무언가를 잘 모르는 모습’과 ‘무언가를 어떻게든 알려고 애쓰는 모습’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다. 내 어린 조카는 작년에는 ‘백 살까지 살겠다’고 선언하더니, 올해는 ‘백만 살까지 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작년에 알던 가장 큰 숫자는 100이었는데, 올해는 백만을 알았으니 기특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뒤섞여 더욱 귀여운 것이리라.

 한창 나이의 젊은이가 아름다울 때는 열정과 수줍음이 충돌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다. 열정을 표현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야 하는데, 이럴 때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너무 나서는 게 아닐까’를 걱정하는 수줍은 마음이 섞이면 그 모습이 참 어여쁘다. 자기만 돋보이려고 하지 않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배려하는 사람, 자신도 힘들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더욱 멋져 보인다.

 중년이 아름다운 순간은 ‘아, 저 사람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때다. 일 중독에 빠져 인생의 아름다움을 누릴 줄 모르는 얼굴, 어떻게든지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려 야단법석을 떠는 얼굴보다는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인생의 소중한 순간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사람들의 약간 고뇌 어린 얼굴이 훨씬 아름답다. 노년이 아름다운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지혜를 젊은이에게 전해 주는 메신저’의 모습을 보일 때다. 훈계조나 명령조로 젊은이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로 빛나는 모범을 보이는 노년이야말로 세상의 귀감이 된다.

 나이 들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은 ‘내 삶’과 ‘내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 사이의 거리조절이다.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이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내 일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따뜻하고 자비로운 사람인가. 이렇게 질문하는 나, 성찰하는 나, 가끔은 스스로를 마음의 죽비로 칠 수도 있는 냉철함과 성숙함이 우리를 자아도취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게 하는 최고의 멘토가 된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삶의 기술’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노력 앞에서 경의를 표할 줄 아는 ‘감상의 기술’이다. 들리는 음악, 보이는 그림, 나른한 오후에 펼쳐 읽는 책 한 권, 하늘과 나무와 바다와 별들, 이 모두가 이 세상의 퍼즐을 맞추어 가는 아름다운 ‘감상의 대상’들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심미적 대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의 여유와 탐미적인 시선이야말로 ‘제 나이에 맞는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 아닐까.

심리학자 카렌 호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 더 나아가 매 순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매일매일 더 나은 자신과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나다움’을, ‘내 나이’를 만들어 갈 것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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