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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변호사 화법 오바마, 방화범 화법 트럼프

중앙일보 2015.12.05 00:18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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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이나 기자회견을 한국어로 동시 통역하려면 쉽지가 않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변호사 출신이라서 그런지 공식 연설이나 발언을 할 때 뒷부분에 전제와 조건을 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단문으로 문장을 끊지 않고 설명과 근거가 뒤에 꼼꼼하게 이어지니 어순이 정반대인 한국어로 바꾸려면 힘들다는 얘기다.

 파리 테러 이후 오바마 대통령이 이슬람국가(IS) 대응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런 ‘변호사 화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지난달 16일 터키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전략은 지속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속가능한 전략이 뭔지에 대해 IS 지도부를 뒤쫓고, 이라크군·쿠르드족을 강화하고, 국경을 막고, IS의 장악 지역을 축소시켜 궁극적으로 IS를 격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는 군사 전략으로 본다면 정답이다. 그런데 이 문장 하나만 75개 단어다. 방대한 군사 전략을 한 문장에 다 담아 정리했으니 IS에 분노하면서 이들의 테러에 질린 대중이 원하는 화끈함은 없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리처드 코언이 오바마 대통령의 IS 대처를 놓고 “오바마 대통령은 옳은 말을 하는데 낯선 이의 장례식을 치르는 목사님처럼 냉담하다”고 비판한 게 같은 맥락이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는 정반대다. 틀린 말만 하고 거짓말까지 하는데 지지층이 반응한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파리 테러 후 트럼프의 화법은 논리고 뭐고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때려부수겠다는 거다. 트럼프는 “나 같으면 그 얼간이들을 폭격해 버리겠다” “유전 파이프를 다 날려 버리겠다”고 했다. 두 문장이 각각 영어로 여섯 단어, 다섯 단어다. 오바마 대통령이 사용한 ‘전략(strategy)’ ‘전력(capabilities)’ ‘기반시설(infrastructure)’ 등과 같은 딱딱한 명사를 트럼프는 쓰지 않는다. 그저 “날려버리겠다(blow up)” “하나도 안 남기겠다(nothing left)”라는 기초 영어에 “얼간이들(suckers)”이라는 비속어를 섞어 시원하게 내질렀다.

 여론조사를 보면 오바마 대통령의 변호사 화법은 사방에서 얻어맞고 있고, 선동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의 방화범 화법은 잘나가고 있다. 지난달 23일 CBS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6%가 “오바마 대통령은 IS 대응책이 없다”고 답했다. “있다”는 23%에 불과했다. IS 대책을 설명해도 대중은 무대책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트럼프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27%를 얻어 공화당 선두를 단독 질주하며 대세론을 다시 굳혔다. 트럼프가 “9·11 테러 때 미국 내 무슬림이 환호했다”는 거짓말을 하건 말건 “날려버리겠다”는 한마디에 청중들은 환호한다.

 그 이유는 뭘까. 민간인을 겨냥한 무차별 테러는 논리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당장은 논리적 접근보다는 분노를 대신해 주는 한마디가 더 먹힐 수 있다. 지금 대중의 정서는 실현 가능한 해법보다 속 시원한 화법을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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