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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블랙프라이데이 금지안

중앙일보 2015.11.30 00:47 종합 3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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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한국 ‘코리아 그랜드세일’, 중국 ‘광군제(光棍節) 할인’에 이어 지난 27일 미국에서 원조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이 시작됐다. 할인TV를 놓고 치고받는 풍경마저 식상할 정도로 전 세계가 미친 듯 사들이는 ‘지름신’의 시대가 도래한 느낌이다.

 폭탄세일의 상징인 블랙프라이데이는 이제 지구촌 축제로 진화됐지만 어원은 꽤 우울하다. 이날 상점들이 흑자로 돌아서 ‘블랙’이 됐다는 말도 있으나 필라델피아 경찰에서 처음 썼다는 게 정설이다. 추수감사절 직후 재고떨이가 시작되면 온 거리가 쇼핑객 차로 꽉 막혀 교통경찰 간에 ‘검은 금요일’로 불렀다는 것이다.

 어쨌든 추수감사절 자체가 신대륙 이민자들의 작품인 터라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만의 잔치로 통했다. 같은 앵글로색슨계 국가인 영국에서조차 딴 나라 얘기였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5년 전 미 온라인업체 아마존이 영국에서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시작해 재미를 본 덕이었다. 그러자 다른 업체들도 미국식 재고떨이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같은 듯 다른 게 영국과 미국이다. 지난해 한 유통업체 매장에서 소동이 일면서 블랙프라이데이 반대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문 밖 밤샘은 물론이고 대형TV를 놓고 중년 여성과 청소년들이 거친 몸싸움을 벌이는 흉한 장면이 보도되자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실제로 올 초 여론조사에선 “블랙프라이데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55%였다. “점잖은 문명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 “다른 고객들이 차분하게 물건을 고르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이처럼 반대여론이 거세지자 의원들이 나서 ‘블랙프라이데이 금지안’까지 냈다. 지난해 소동이 났던 유통업체도 자발적으로 세일 중단을 선언했다. 영국뿐 아니다. 미국 위스콘신주에서는 영세상인 보호를 위해 대형업체의 폭탄세일 자체가 불법이다.

 이번 코리아 그랜드세일은 별 탈 없이 넘어가긴 했다. 하지만 이달 초 H&M 특별세일에서 벌어진 몸싸움을 보건대 우리도 마음 놓긴 이르다. 지난번엔 할인 폭이 시시해서 그랬지 최신 TV도 90% 깎아 주는 폭탄세일이 열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청빈과 근검절약이 숭상받던 곳이 ‘선비의 나라’ 한국이었다. 그랬던 이 땅에서 떨이 TV를 놓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권장되는 세태가 서글프다. 경기부양을 위해 어쩔 수 없더라도 영국인들이 왜 블랙프라이데이를 막으려 하는지 곰곰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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